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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그리다442

시든다 한들 피어나길 주저할까 - 경주의 봄 우리나라에 경주라는 도시가 있다는 것은 축복(祝福)이다. 경주에 들어서는 순간의 느낌부터가 다르다. 불어오는 바람 내음이 다르고 공기에서도 오랜 세월이 느껴진다. 익숙한 누군가가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봐 주는 듯한 편안한 느낌이 있어서 언제나 경주를 생각하면 노곤한 졸음이 오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때부터 이십여 년 이상을 살았으면서도 정작 이 땅에 발붙이고 살 때는 좋은 걸 몰랐다. 늘 마주치는 문화재들은 지루한 존재들이었고, 전통(傳統)과 보전(保全)이라는 키워드로 변화의 기운을 억압하고 있는, 박제(剝製)된 도시에서의 일상은 무료했다.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었던 이 도시가 이제는 그리움의 대상이 된 것은 그저 무심히 흐르는 세월 탓만은 아닐 것이다. 경주는 언제 찾아도 좋은 곳이.. 2023. 1. 26.
나 또한 풍경이 되어 거닐어본다 - 감은사지 경주는 신라 천년의 고도(古都)다. 상투적이고 진부(陳腐)하지만 달리 표현하기도 쉽지 않다. 세계 역사를 통틀어서도 신라처럼 천년 가까이 유지된 국가도 드물뿐더러 경주와 같이 한 번도 도읍을 옮기지 않고 수도(首都)로서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한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신라를 빼고 경주를 얘기할 수도, 경주를 빼고 신라라는 나라를 논할 수도 없다.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 귀부(歸附)하며 신라 왕조가 막을 내린 이후 다시 천년의 세월이 훌쩍 흘렀다. 화려했던 고대 왕국의 흔적은 이제 역사책에서나 온전히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지만 지금도 경주의 구석구석에서 세월의 파편으로 남아 있는 천 년 전 사람들의 손길을 느껴볼 수 있다. 귀중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문화재가 여염집 빨래판으로 쓰일 .. 2023. 1. 25.
산상의 화원에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 - 만항재 불과 몇 시간을 차로 달려왔을 뿐인데 확연히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다. 만항재 정상에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상쾌하다. 해발 1,330m 높은 자리에 있는 숲에 들어서면 산 아래 동네보다 십여 도 이상 선선한 느낌이 든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 경보도 다른 세상 이야기인 셈이다. 꽃쥐손이, 양지꽃, 노루오줌, 짚신나물 등 여름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는 모습이 말 그대로 ‘산상의 화원(花園)’답다. 만항재에서 함백산 정상에 이르는 산길 전체가 꽃밭인 셈이다. 공원이나 수목원처럼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이 아니다 보니 자연스러움이 물씬 풍겨서 좋다. 한여름이라고 해도 새벽녘 만항재에서는 한기를 느낄 정도로 날씨가 서늘하다. 으스름 달빛 아래 이슬이 촉촉하게 내려앉은 야생화들의 배웅을 받으며 함.. 2023. 1. 24.
햇살 빛나고 바람 서늘한 가을날에 - 구룡사 가을을 참 좋아한다. 태어난 때가 그 무렵이기도 하거니와 사물을 더욱 풍성하고 돋보이게 해주는 가을날의 빛과 서늘한 바람이 한량없이 좋기 때문이다. 마침 딱 그런 가을날에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치악산 구룡사를 찾았다. 가을날에는 어떤 곳을 가도 좋겠지만 이날의 날씨는 환상적이었다라고 밖에 표현을 할 수 없겠다. 구룡사 얘기는 오래 전부터 많이 들었다. 근처를 여러 번 지나면서도 또 이상하게 나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매번 다음 기회로 미루다가 그렇게 무심한 시간만 덧없이 흘렀다. 다소 즉흥적인 선택이었지만 이 좋은 가을날에 구룡사를 가지 않았더라면 많이 후회할 뻔했다. 절에 이르는 그 상쾌하고 서늘한 숲길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시원스러운 물소리가 들리는 계곡을 끼고 절.. 2023. 1. 23.
오래된 성곽 한 바퀴 걸어보기 - 해미읍성 의도한 건 아닌데 참 많이 걸었던 날이었다. 입구를 착각했던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한참을 걷다 “뭔가 잘못 됐구나”는 느낌이 퍼뜩 들긴 했지만 되돌아가기 귀찮아서 결국 둘레가 1,800미터에 달하는 해미읍성을 한 바퀴 돌게 된 것이다. 관광객 중에 나처럼 해미읍성 둘레를 걸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문이야 동서남북 여러 개 있을 테니 그 중에 하나라도 열려있겠거니 생각했었는데 정문을 빼고는 모두 굳게 잠겨있었던 것이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리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이런 경험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며 혼자 위안을 삼았다. 당장의 고생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 그리운 추억(追憶)이 되는 것처럼 그날의 고생도 아름답게 포장하고 있다. 이전에 다녀왔던 낙안읍성과 성곽(城廓)의 느낌은 비슷하지만 .. 2023. 1. 22.
마음 씻고 마음 여는 절 - 개심사 개심사(開心寺). 마음을 여는 절이라고 하면 될까. 참 멋진 이름을 가진 절이다. 직접 가보면 이름만 좋은 게 아니라 그 이름에 어울리는 아름다움과 멋스러움을 지닌 절이란 걸 알게 된다. 모처럼 ‘산사’라는 이미지에 걸맞는 아담하고 조용한 절을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가웠다. 사십 여년을 살아왔던 경상도 땅의 산과 들에서 느껴지는 감흥(感興)과 전라도나 충청도의 그것은 분명 다르다. 확연히 다른 느낌을 누구라도 초행길에서 생생히 맛볼 수 있다. 경상도 내륙 지형에서 기개가 느껴지는 대신, 뭔가 고집스럽고 우악스러운 느낌도 있는 반면, 충청도 서산 땅에서는 어린 시절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것 같은 편안함과 따뜻함이 느껴져 좋다.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갈 때마다 그 따뜻한 느낌에 마음을 온통 빼앗기곤 한다. .. 2023. 1. 21.
절이 흥(興)해야 나라가 흥한다는 호국 도량 - 흥국사 여수 시가지 어느 나지막한 산속에 들어앉아 있는 절인 줄 알았었다. 흥국사는 몇 해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인데 이런저런 핑계로 한참이 지나서야 찾아 나서게 됐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수많은 공장들이 들어 서 있는 여수국가산업단지를 지나 절에 들어가는 입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이채로웠다. 말로만 듣던 영취산 아래에 흥국사가 있었다. 해마다 봄이면 온 산이 온통 붉은 진달래로 장관을 이룬다는 영취산이 바로 이곳이었다니. 때마침 이날 영취산 진달래 축제가 열리는 모양이었다. 절 입구에서부터 차량 통제를 하고 있었고, 일주문 앞에는 축제 준비가 한창이어서 기대했던 산사의 고요함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시간이 좀 일러서인지 다행히 찾는 이가 많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활짝 피어난 봄꽃을 찾아다니며 봄을 만끽.. 2023. 1. 20.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 순천만 생태의 보고(寶庫), 순천만을 다시 찾았다. 한여름 폭우처럼 세차게 쏟아지던 봄비도 그쳐 날씨는 그지없이 좋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때 이른 더위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식혀 주어 순천만을 완상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수백km를 달려 배고픔을 견디며 전망대를 올랐던, 무모했던 첫 순천여행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여정이었다. 눈 감으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떠오르는 순간들이다. 2008년 5월의 어느 봄날이었던가. 황홀한 순천만의 낙조(落照)에 마음을 빼앗겨 무작정 달려갔었다. 하지만 순천만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출발할 때만 해도 멀쩡하던 날씨가 순천만에 도착하자마자 돌변했다.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듯 하늘은 어두워지고, 바람은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불어댔다. 발길을 돌려야 하.. 2023. 1. 19.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흔적 하나 없네 - 송광사 조계산 건너편엔 선암사 말고도 또 하나의 큰 절이 자리 잡고 있다. 조계산이 명산은 명산인가 보다. 순천 분들이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멋진 두 개의 절을 지척(咫尺)에 두고 언제든 찾아갈 수 있으니까. 깊은 산 속의 깊은 절, 선암사를 뒤로하고 승보사찰 송광사를 찾았다. 송광사는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 스님부터 조선시대 초기 고봉국사에 이르기까지 열여섯 분의 국사(國師)를 배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름난 스님들이 이곳에서 수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송광사의 창건과 관련된 기록에는 신라 말기에 혜린 스님이 마땅한 절을 찾던 중 이곳에 이르러 산 이름을 송광(松廣)이라 하고, 절 이름을 길상이라 하였다 한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규모의 사찰이었으나,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정혜사를 이곳으로 옮겨 수선.. 2023. 1. 18.
천진동자불 얼굴 속에 피안(彼岸)이 있다 - 도리사 복사꽃과 오얏꽃이 도리사(桃李寺)와 무슨 관계가 있어 절 이름에 들어가는 걸까. 이는 역시 도리사의 창건 설화와 관련이 있다. 도리사를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아도화상이 신라 눌지왕 때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고구려를 떠나 신라에 들어와 어려움을 겪다 마침내 소지왕의 신임을 얻어 불교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때 신라 왕궁을 떠나 지금의 구미시 해평면 냉산(지금의 태조산)에 아래 모례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며 불법을 전하고 있었는데 때가 한겨울인데도 산중턱에 복숭아꽃과 배꽃이 만개한 것을 보고 이곳에 절을 지었으니 이 절이 바로 지금의 도리사라는 설명이다. 桃李寺前桃李開 도리사 앞에는 도리꽃 피었더니 墨胡已去道師來 묵호자 가버린 뒤 아도가 왔네 誰知赫赫新羅業 뉘 알리요, 빛나던 신라 때 모습 終始毛郞窨裏灰.. 2023. 1. 16.
이 골목 끝에 네가 서 있다면 좋을 텐데 - 동피랑 통영은 매력적인 도시다. 통영이란 이름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4년에 삼도수군통제사 이경준이 통제영을 지금의 통영시인 두룡포로 옮기면서 시작되었다 한다. 시로 승격되면서 충무공의 시호를 딴 충무라는 명칭을 쓰다가 1995년에 통영군과 도농통합이 이루어지면서 다시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통영과 충무라는 이름 모두 그 옛날 남해 바다를 지키던 조선 수군에서 연유한 것인데 세병관, 충렬사 같은 유적이 과거를 묵묵히 증언한다. 너른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항구도시답게 활달하고 풍성하다. 조선시대 통제영에 물품을 공급하던 공방 장인들의 미감(美感)이 장쾌한 바다의 DNA를 만나 수많은 예술가를 낳았다. 시인 김춘수, 유치환, 김상옥, 소설가 박경리, 작곡가 윤이상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면모는 화려하다. 화가 이.. 2023. 1. 15.
망망대해에 별처럼 박혀 있는 섬들을 바라보다 - 통영 미륵산 미륵산에 오르면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한눈에 즐길 수 있다. 예전에는 다들 미륵산을 걸어 올랐겠지. 해발 461m에 불과하지만 웬만한 내륙의 산보다 높아 보인다. 미륵산 정상의 전망대에서 망망대해에 촘촘히 별처럼 박혀 있는 섬들을 내려다보는 느낌이 아주 좋다. 몇 해 전에 한려수도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그 길이 무려 1,975미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고 한다. 전국의 유명한 산마다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는 곳이 많지만 여기처럼 시원스럽게 펼쳐진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도 드물다. 케이블카를 타고 미륵산을 오르며 발아래 펼쳐지는 한려수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용료가 아깝지 않다. 한참 케이블카 속에서 경치에 빠져 있다 보면 상부역사에 도.. 2023. 1.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