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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그리다

천진동자불 얼굴 속에 피안(彼岸)이 있다 - 도리사

by 푸른가람 2023.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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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꽃과 오얏꽃이 도리사(桃李寺)와 무슨 관계가 있어 절 이름에 들어가는 걸까. 이는 역시 도리사의 창건 설화와 관련이 있다. 도리사를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아도화상이 신라 눌지왕 때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고구려를 떠나 신라에 들어와 어려움을 겪다 마침내 소지왕의 신임을 얻어 불교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때 신라 왕궁을 떠나 지금의 구미시 해평면 냉산(지금의 태조산)에 아래 모례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며 불법을 전하고 있었는데 때가 한겨울인데도 산중턱에 복숭아꽃과 배꽃이 만개한 것을 보고 이곳에 절을 지었으니 이 절이 바로 지금의 도리사라는 설명이다. 

桃李寺前桃李開
도리사 앞에는 도리꽃 피었더니
墨胡已去道師來
묵호자 가버린 뒤 아도가 왔네
誰知赫赫新羅業
뉘 알리요, 빛나던 신라 때 모습
終始毛郞窨裏灰
모례의 움집 속엔 재뿐인 것을!

신라 최초의 가람 도리사는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신라에 포교를 하기 위해 세운 신라불교의 발상지이다. 도리사 현판이 붙어있는 태조선원은 스님들이 참선수행하는 선방으로 정면 7칸 측면 8칸 규모의 ㄷ자형 건물이다.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붉은 감들이 눈에 띈다. 성철 큰스님도 이곳에서 정진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시대 영남 사림의 조종(祖宗)으로 칭송받았으며 한때 선산부사를 지내기도 했던 점필재 김종직은 ‘선산의 열 가지 빼어난 것’ 가운데 하나로 도리사를 꼽으며 한 편의 시를 남겼다. 짧은 글 속에 도리사의 역사가 녹아 있다. 

차를 타고도 가파른 오르막길을 한참 올라가 태조산 정상에 도착하고서야 도리사의 여러 전각들을 만날 수 있다. 산사(山寺)라는 이름이 어울릴만하다. 꽤 높게까지 올라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절에 올랐는데도 걸음 떼기가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힘든 것이 있다면 그 속에서 얻는 것도 있는 법. 절 경내에서 산 아래 탁 트인 해평 들녘을 바라보는 기분이 아주 상쾌했다. 높이 올라야 멀리, 또 넓게 볼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산 정상부에 자리 잡고 있어 각각의 전각들도 띄엄띄엄 떨어져 가파른 계단들로 이어져 있다.

도리사는 그리 큰 규모의 사찰은 아니다. 해동최초 가람이라고는 하나 1,600년 고고한 역사에 비해 현재의 위상이 높다고 하긴 어렵다. 지금의 도리사는 본디 있었던 터전이 아니라 부속암자의 자리였다고 하니 한창 융성했던 도리사의 모습을 지금 상상하긴 어려운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도리사의 이름이 다시금 회자(膾炙)되었던 것은 사리탑 덕분이었다. 1977년 절 담 밖에 있던 석종(石鐘) 형태의 사리탑에서 예상치도 못했던 사리함과 사리가 발견된 것이다. 이 유물들이 8세기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면서 많은 관심을 모으게 됐다.

원래 이 사리탑은 삼성각 뒤 담장 밖에서 호젓이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도굴꾼의 손을 타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져 한동안 방치되었던 탑을 다시 경내로 옮겨 세우는 과정에서 사리함과 사리가 발견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사리공이 이중으로 장치된 데다 안쪽은 석회로 단단히 봉해져 있어 도굴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의 지극한 보살핌 덕분이었으리라.

절에 들어서면 스님들이 설법하고 강연하는 설선당, 공양간인 수선요를 만나게 된다. 수선요 맞은편에는 도리사를 찾는 사람들이 편히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실 수 있는 반야쉼터라는 곳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산사에서 즐기는 차 한 잔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극락전은 서방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티마불을 모신 법당이다. 정면과 측면이 모두 3칸인 팔작지붕 건물인데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법당 내부에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아미타후불탱화를 봉안하고 있다.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스님들의 수행선방인 태조선원과 극락전(경북문화재자료 제318호)이 있고, 극락전 앞으로 보물 제470호로 지정된 도리사 석탑이 자리 잡고 있다. 도리사 석탑은 높이가 4.5m미터 달하고 기단 높이는 1.3미터 기단의 너비는 3미터 남짓인데 모양이 일반적인 석탑과는 사뭇 다른 독특한 양식을 보이고 있다. 

기본형태가 방형인 이 탑은 어찌 보면 계단(戒壇)의 일종 같기도 하고 달리 보면 모전석탑의 변형처럼 보이기도 해 탑이라고 단정 짓기 어렵다. 다른 절에서는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없는 이 석탑을 도리사에서는 ‘화엄석탑(華嚴石塔)’이라 부르는데 그 연유를 아는 이는 없다.

다시 계단을 오르면 적멸보궁에 이르고 그 뒤로 사리탑이 있다. 높이 1.3미터 남짓의 크기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석종형 부도, 세존사리탑이다. 도리사에도 흔치 않은 적멸보궁이 있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이란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법당을 말하는데, 불상을 따로 안치하지 않는다. 보통은 법당 뒤쪽에 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사리탑이 자리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에는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부처의 사리와 정골을 봉안한 5대 적멸보궁이 있는데, 영취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가 그곳이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을 일컫는다.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법당 뒤쪽에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을 조성하여 법당 안에서 사리탑을 향해 예불을 드린다. 도리사 적멸보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인데, 적멸보궁 오르는 계단 입구에는 천진난만한 표정의 동자불이 신자들을 반갑게 맞이해주고 있다.

도리사를 찾았던 날은 늘 마음이 무거웠던 것 같다. 이 또한 내가 도리사를 찾게 되는 인연이란 생각이 든다. 도리사는 절 입구까지 포장되어 있어 차로 오기 무척이나 편하지만 내게는 심산유곡(深山幽谷)에 외로이 고립되어 있는 섬처럼 느껴진다. 군 입대 전 친구들과 찾았던 소매물도 꼭대기에서 그림처럼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던 느낌이랄까.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고요한 적멸보궁도, 오랜 세월의 무게가 전해져 오는 극락전도, 단정한 사대부집처럼 느껴지는 태조선원 또한 예전 그 모습 그대로였다. 시간은 그대로인데, 나만 홀로 달라져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얼굴 가득 환하고 천진난만한 웃음을 띠며 반겨주는 천진불자상을 보니 반가웠다. 지난번에는 손바닥에 동전이 가득이더니 오늘은 몇 되지 않는다. 그렇거나 말거나 늘 그 미소는 따뜻하다.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은 그 동자불의 미소에 위로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이 도리사 천진동자불의 미소에 피안(彼岸)이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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