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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그리다

햇살 빛나고 바람 서늘한 가을날에 - 구룡사

by 푸른가람 2023.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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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참 좋아한다. 태어난 때가 그 무렵이기도 하거니와 사물을 더욱 풍성하고 돋보이게 해주는 가을날의 빛과 서늘한 바람이 한량없이 좋기 때문이다. 마침 딱 그런 가을날에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치악산 구룡사를 찾았다. 가을날에는 어떤 곳을 가도 좋겠지만 이날의 날씨는 환상적이었다라고 밖에 표현을 할 수 없겠다.

구룡사 얘기는 오래 전부터 많이 들었다. 근처를 여러 번 지나면서도 또 이상하게 나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매번 다음 기회로 미루다가 그렇게 무심한 시간만 덧없이 흘렀다. 다소 즉흥적인 선택이었지만 이 좋은 가을날에 구룡사를 가지 않았더라면 많이 후회할 뻔했다.

절에 이르는 그 상쾌하고 서늘한 숲길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시원스러운 물소리가 들리는 계곡을 끼고 절에 이르는 그리 길지 않은 숲길에는 잘 자란 나무들이 서로 어깨동무하듯 펼쳐져 있다. 이런 좋은 숲길에 오면 늘 가슴이 탁 트이는 청량(淸凉)한 느낌이 들어 좋다. 그 어떤 마음의 번뇌(煩惱)도 사라질 것만 같은, 딱 그런 기분이다.

원통문을 시작으로 절에 들어선다. 흔히 절의 입구에 일주문을 세워 속세와 절의 경계(境界)를 나타내는 법인데, 원통문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은 흔치 않다. 숲길은 평탄하고 흙길은 너무나 부드럽다. 의성 고운사의 숲길이 바로 이런 느낌이다. 걷고 또 걷고 싶은 길이다. 숲이 시원스런 그늘을 만들어 줘서 한여름에도 더울 것 같지가 않다.

구룡사에 이르는 숲길은 평탄하고 흙길은 너무나 부드러워 언제든 걷고 싶은 길이다. 의성 고운사의 숲길을 걷는 느낌과 무척 닮았다. 숲이 풍요로운 그늘을 만들어 한여름에도 더위를 잊을 수 있다.

아름다운 숲길을 음미하듯 찬찬히 걸어 오르면 구룡사 경내에 들어서게 된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많이 아담한 절이었다. 산자락에 위치해 있어 단(壇)을 이루어 건물들이 들어설 수밖에 없으니 아래에서 위를 보면 다소 위압적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 대웅전 앞 보광루에 앉아 맞은편 산을 바라보는 느낌이 아주 시원스럽다. 보광루 이층 마루에 깔린 멍석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것이라고 한다. 

어느 절집이든 그 절의 시원(始原)과 관련해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구룡사 역시 마찬가지다. 아주 오래전 의상대사가 절 자리를 보러 원주에 들렀다가 치악산을 향해 떠났다. 육십 여 리 길을 가던 스님이 비로소 걸음을 멈추었는데, 그 자리가 바로 구룡골이었다. 

스님이 사방을 살펴보니 동쪽으로는 치악산의 주봉인 비로봉이 솟아있고 다시 천지봉의 낙맥이 가로지은 데다 경치 또한 아름다웠다. 절을 세울만한 자리라 생각한 스님이 연못 가로 다가갔더니 그곳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다.

절을 세우려면 연못을 메워야겠고, 연못을 메우려니 모여 사는 용을 쫓아내야 하는 상황이라 난감해하던 스님의 마음을 용케 읽어낸 용들이 내기를 청했다. 용들이 연못 위로 날아올라 뇌성벽력(雷聲霹靂)과 함께 폭우를 쏟아 부었다. 얼마나 기세가 대단했던지 이내 산들이 물에 잠기고 사람들도 모두 급류에 쓸릴 판이었다. 

구룡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다섯 단의 석축을 쌓아 올려 크기는 작지만 단아하고 위엄이 느껴진다. 2003년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다시 복원했다.

내기에 이길 것을 자신한 용들이 내려와서는 깜짝 놀랐다. 물귀신이 되었을 것이라 여겼던 스님이 어느새 배 위에서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닌가. 아홉 마리 용들이 땅으로 다 내려오기를 기다려 스님은 부적 한 장을 그려 연못에 넣었다. 그랬더니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연못의 물이 끓기 시작했다. 

열기를 견디지 못한 용들은 연못에서 뛰쳐나와 모두 동해바다로 줄행랑을 놓았다. 용들이 급하게 달아나던 탓에 구룡산 앞산에는 여덟 개의 골이 생겨났고, 그 중 한 마리는 눈이 멀어 근처의 작은 연못에 머물다가 일제강점기 때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지금도 남아 있는 구룡소가 바로 그곳이겠다. 

한여름에도 서늘한 바람이 불어 더위를 잊게 해준다. 단풍이 곱게 물드는 가을날의 풍경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늘로 떠났던 눈 먼 용이 다시 이곳을 찾아온 건 아닐까. 구룡소의 짙은 물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의상대사와 용들이 내기를 벌였다는, 오래된 이야기를 매번 떠올리게 된다. 

아홉 마리 용에 관한 전설이 있었기 때문에 구룡사라 불리다가 조선 중기 이후 지금과 같이 구룡사(龜龍寺)로 이름이 바뀌었다. 도선, 무학, 휴정 등 이름난 고승들이 머물면서 영서지방 수찰(首刹)의 지위를 지켜왔는데 조선 중기 이후부터 사세가 급격히 기울어지자 어떤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절 입구의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氣)가 쇠약해졌으니 그 혈을 끊으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거북바위 등에 구멍을 뚫어 혈을 끊었지만 오히려 사세는 쇠퇴하였다고 한다. 

쉼 없이 흐르는 물소리를 따라 계곡에서 잠시 쉬어가도 좋다. 구룡소에서 흘러나온 명경처럼 맑고 깨끗한 계곡 물에 손을 담그면 서늘한 가을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해 질 무렵 서늘한 바람이 불 때면 잠시 손을 담고 있기도 힘들 정도다.

이후 한 스님이 “절 입구를 지키던 거북바위가 절의 기운을 지켜왔는데 누가 그 바위를 동강내 혈맥을 끊어버려 운이 막혔다”고 해 거북바위의 혈을 다시 잇는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용이 아홉 마리이든, 거북과 용이 있어서든 구룡사는 용을 빼고는 얘기할 수가 없겠다. 

지금 남아 있는 당우는 대웅전, 보광루, 삼성각, 심검당 등으로 아담한 규모이지만 이곳도 공사가 한창인 것을 보니 또 여러 해가 지나면 지금과 다른 느낌의 절로 바뀔지도 모르겠다. 절 앞에 있는 큰 은행나무도 명물이다. 가을이 깊어갈 때면 샛노랗게 물든 은행잎들이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그림 같다. 구룡사를 와서 많이 놀랐던 것이 있다. 천왕문을 지나 구룡소 가는 길목에 있는 커피가게 때문이었다. 전통찻집이야 절에서 자주 봤지만 아메리카노, 에스프레소를 파는 커피전문점이라니.

치악산 오르는 길목에 구룡소가 아담하니 자리 잡고 있다. 물이 맑고도 무척 시원하다. 해 질 무렵 서늘한 바람이 부니 잠시 손을 담고 있기도 힘들 정도다. 소(沼)의 물이 아래로 흘러 너른 계곡이 펼쳐진다. 한여름이면 잠시 쉬면서 땀을 식혀가도 좋고, 가을이면 울긋불긋한 단풍이 물들어 환상적인 풍경을 뽐낸다.

돌아내려 오기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다시 숲길로 들어섰다. 짧아진 해가 벌써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가을 햇볕이 무척이나 따사롭다. 다시 이 절을 찾아야겠다. 언제가 될지 모를 그날도 햇살은 환히 빛나고 바람은 서늘한, 그렇게 휘량(輝凉)한 가을날이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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