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풍경을 그리다442

화마의 상처를 딛고 푸름을 되찾다 - 낙산사 그냥 봐서는 엄청난 화재를 겪었던 곳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낙산사를 찾았었지만 큼지막한 불상과 바닷가 암벽 위의 암자, 그리고 푸른 동해 바다 정도만 기억에 남아 있다. 낙산사는 2005년 4월 6일에 일어난 산불로 사찰의 모든 것을 잃었었지만, 고맙게도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사상 최악이라던 고성․양양지역의 산불은 천년 고찰 낙산사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빼앗아갔다. 뉴스 화면으로 전해지던 시뻘건 불덩이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거센 바람을 타고 수십여 미터를 날아가는 불씨를 막아내기에 사람들의 힘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원통보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각들과 함께 보물 제479호 낙산사 동종도 그때 소실되었다. 쇳덩어리를 녹여 없앨 정도의 화마(火魔).. 2022. 2. 28.
꽃무릇은 지고, 단풍은 불타오르고 - 선운사 산 아래 실개천이 흐르고 울창한 숲이 내를 감싼다. 가끔씩 구름이 쉬었다 간다. 한껏 여유로운 풍경이다. 바람처럼 잠시 머물다 가도 좋다. 선운사는 꽃이 있어 아름다운 절이다. 봄이면 동백꽃, 여름이면 배롱나무꽃, 그리고 가을이면 꽃무릇이 붉게 타올라 절을 가득 채운다. 우람한 느티나무와 아름드리 단풍나무가 사천왕처럼 호위(護衛)하는 숲길을 지나 선운사에 당도한다. 선운사는 잎이 지고 난 뒤 꽃이 피어 상사화라고 불리는 꽃무릇 군락지(群落地)로 유명하다. 도솔천 계곡과 산비탈을 수놓는 가을 단풍도 아름답기로는 뒤지지 않는다. 사시사철 붉디붉은 꽃들이 풍성하게 피어난다지만 때를 잘 맞추지 못하면 허사다. 꽃이란 것이 또 언제 피었냐는 듯 소리도 없이 져버리니까. 이번에도 그랬다. 그 유명한 선운사 꽃무릇을.. 2022. 2. 27.
풍요 속 배고픔의 향수를 떠올려본다 - 학원농장 청보리밭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가곡 중에서 이곳에 오면 절로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어릴 적엔 바람에 넘실거리는 보리밭이 참 흔했었는데 이제는 보기 힘든 진풍경이 되었으니 무상한 세월을 느끼게 한다. 그리운 풍경을 보러 발품을 팔아보는 것도 좋다. 서해 바다와 접한 고창 땅 학원농장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청보리밭을 한번 걸어보는 건 어떨까. 이 농장은 1960년대 초 전직 국무총리를 지냈던 진의종 부부가 함께 황무지였던 40만 평의 야산을 개간했다고 한다. 처음엔 뽕나무를 심어 양잠업을 했고, 70년대 들어서는 목초를 재배하여 한우를 키우다가 90년대 초에 설립자의 장남이 귀농하여 정착하면서 보리와 콩을 대량으로 재배하.. 2022. 2. 26.
산책하듯 거닐고 싶은 아름다운 수목원 - 천리포수목원 천리포수목원은 이채롭게도 외국인이 설립한 곳이다. 1979년 우리나라에 귀화해 민병갈이라는 이름을 얻은 칼 밀러가 오랜 세월 동안 일궈낸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수목원이다. 2000년에는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세계에서 12번째, 아시아에서는 첫 번째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인증까지 받았다고 한다. 오래 전부터 가고 싶었지만 정작 천리포수목원 구경은 『정원 소요』라는 책이 먼저였다. 대학에서 조경을 전공한 그의 친절한 설명 덕분에 천리포수목원의 구석구석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게 됐으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글뿐만 아니라 사진 솜씨도 예사롭지 않다. 강렬하지 않되, 담백하며 기품이 있다. 이른 봄날을 가득 채워주는 목련처럼 부지런한 심성을 지닌 사람일 거라 생각해 본다. 봄처럼 화사하되.. 2022. 2. 26.
바다 옆에 놓인 사막을 걷다 - 신두리 해안사구 나는 지금 사막을 걷고 있다. 몇 걸음을 떼면 이내 신발은 모래투성이가 된다.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온통 입속에 모래 알갱이들이 사각거리는 게 느껴진다. 태안반도에 있는 신두리 해안사구라는 곳이다. 사구라고 부르는데 모래 언덕이란 뜻이다. 밀물과 썰물의 차이로 파도에 밀린 모래가 바닷가에 지속적으로 쌓이고, 썰물 때면 햇빛을 받아 물기가 빠지면서 바닷바람을 타고 날아가 쌓이게 된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자연이 만들어 낸 경이로운 선물이 아닐까 싶다. 전체 길이가 3.5km 폭은 200미터에서 넓은 곳은 1.3km, 제일 높은 곳은 4.6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있는 해안사구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곳이다. 조금 걷다 보니 누군가 모래 언덕에서 미끄럼을 타고 내려온 흔적이 여러 군데 눈에 띈다. .. 2022. 2. 26.
함양의 축복, 아름다운 천년의 숲 - 함양 상림 함양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축복과도 같은 숲이다. 여름엔 희고 붉은 연꽃이 아름답게 피어나고, 가을이면 눈처럼 떨어져 쌓이는 낙엽이 애잔하면서도 화려한 빛의 향연을 선사한다. 신라 말기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 고을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위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물길을 돌리고 그 둑을 따라 나무를 심었던 것이 지금과 같은 큰 숲이 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대관림으로 불렸다는데 큰 홍수가 나 숲의 중심부가 파괴되자 그 틈으로 집들이 들어서며 상림과 하림으로 나뉘었다가 지금은 상림만 남았다는 이야기다. 3만 6천여 평에 이르는 광활한 터에 2만여 그루의 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뤄 여름에는 무더위를 잊을 수 있는 시원한 그늘을, 가을에는 환상적인 단풍의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다. 매번 상림을 갈 때면 함양 사람들.. 2022. 2. 26.
정자와 계곡 따라 선비의 발걸음을 좇다 - 화림동계곡 예로부터 좌안동 우함양이라 불릴 만큼 함양 땅은 영남 유학을 대표하는 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었다. 선비들이 시문을 짓고 풍류(風流)를 즐겼던 정자들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시원스러운 계곡이 끝없이 이어진다. 함양에는 선비문화탐방로가 조성되어 있다. 길은 화림동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화림동계곡은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이 육십 리를 흘러내리면서 구석구석마다 기이한 바위와 물웅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예전에 한양에 과거보러 올라갈 때면 반드시 지나야했던 길목이었다고 한다. 거연정에서 시작한 아름다운 길은 두시간 정도를 걸어 농월정에서 마친다. 거연정은 계곡 가에 있어 그 풍광이 탁월하다. 정자에 오르면 계곡을 흐르는 세찬 물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 정도다. 거연정(居然亭)이란 자연에 머문다는 뜻이니 놓인.. 2022. 2. 26.
지리산을 마당에 앉힌 집 - 산천재 따뜻한 봄바람 불어오는 3월의 어느 날에 무작정 산청으로 발길을 옮긴 이유는 산천재 때문이었다. 지리산 자락 아래 산청 고을에 자리 잡고 있는 남명 조식의 옛집 산천재 역시 『철학으로 읽는 옛집』이란 책 덕분에 다녀온 여정 가운데 한 곳이다. 책 표지에 담긴 산천재의 모습은 따사로웠다. 몇 채 되지 않는 건물과 너른 마당을 주인처럼 자리 잡고 있는 매화나무 한그루가 주는 충만함은 묘한 끌림이 있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산천재를 향한 짝사랑은 몇 달이 지나서야 겨우 그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때마침 5백 년도 훨씬 넘은 유명한 남명매(南冥梅)가 화사한 꽃망울을 터뜨려 멀리서 찾아온 빈객을 맞아주고 있었다. 실제 본 산천재는 전체적으로 좀 더 휑한 느낌이 들었다. 흑백 사진 속의 모습과 달리 고운 단청으로 .. 2022. 2. 26.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가을 - 주왕산과 주산지 역시나 이번에도 너무 늦어 버렸다. 제대로 된 주왕산의 단풍을 즐기려면 10월 말, 늦어도 11월 초순을 넘겨서는 안 될 것 같다. 늘 그렇듯 단풍이 절정을 이룰 무렵이면 주말, 평일을 가리지 않고 몰려드는 행락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룰 게 뻔하다. 이런 번잡(煩雜)함이 싫어 조금 이르거나, 혹은 조금 늦은 시기를 찾다 보니 늘 아쉬움이 남는다. 어차피 모두를 다 가질 수는 없으니, 하나를 잃는다 해서 너무 아쉬워할 일도 아니겠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것이 또 그런가. 꿀맛 같은 단잠의 유혹을 물리치고 새벽 일찍부터 서둘렀지만 벌써 대전사 앞마당은 형형색색의 등산복으로 차려입은 산행객들로 가득 찼다. 모처럼 안개 자욱한 주왕산의 고즈넉함을 홀로 누려볼까 했던 기대는 언감생심(焉敢生心) 이었나 보다. 주왕산은 정.. 2022. 2. 26.
상서(祥瑞)로운 돌로 만든 전통정원의 아름다움 - 서석지 서석지(瑞石池)란 이름을 풀이해 보면 상서(祥瑞)로운 돌로 만든 연못이란 뜻이다. 경북 영양군 입암면에 위치한 서석지는 조선 광해군과 인조 때 성균관 진사를 지낸 석문(石門) 정영방의 별장이었다.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부용원과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민간정원으로 꼽히는 곳이다. 소쇄원은 여러 번 가본 적이 있었던지라 ‘한국의 3대 민간정원’이라는 말만 듣고 기대에 부풀어 처음 이곳을 찾았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정원이라면 꽤 유명한 곳일 텐데 왜 알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은 서석지에 이르는 여정(旅程)에서 스스로 찾을 수 있었다.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는 그만한 가치(價値)가 없어서가 아니라, 노력이 부족해서였던 것 같다. 소쇄원처럼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라도 되.. 2022. 2. 26.
낙동강에 띄어진 한 척의 돛단배 - 병산서원 역시 여름을 빛내주는 것은 배롱나무꽃이다. 밋밋한 여름 풍경 속에서 배롱나무꽃의 붉디붉은 빛은 확연히 도드라져 보인다. 화려한 봄꽃의 향연과 울긋불긋 타오르는 만엽홍산(萬葉紅山) 가을 단풍을 이어주는 고마운 꽃이다. 하루 이틀 남몰래 피었다 지는 것도 아니고 목백일홍이란 이름처럼 무려 백일 동안이나 피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주니 얼마나 대견한가. 배롱나무꽃을 보러 굳이 멀리 갈 필요는 없다. 명옥헌 원림 같은 이름난 명소는 아닐지라도 가까이에도 좋은 곳들이 많기 때문이다. 낙동강을 따라 난 좁다란 흙길로 병산서원을 찾아가는 길은 언제나 묘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불편하긴 하지만 어릴 적 추억이 떠오르는 길이다. 마주 오는 차를 만나면 잠시 멈춰 비켜 주어야 한다. 뽀얗게 피어오르는 먼지가 마땅찮을 때.. 2022. 2. 26.
금강의 느린 가락에 바람과 갈대가 춤을 추다 - 신성리 갈대밭 갈대들이 바람에 넘실대며 춤을 추는 것 같다. 나는 지금 신성리 갈대밭을 거닐고 있다. 갈대밭 너머에는 드넓은 금강의 도도한 물결이 휘돌아 나가고 제방 옆 논바닥으로 석양이 살포시 내려앉고 있다. 황포돛대를 단 나룻배는 강을 미끄러지듯 오르내린다. 살짝 비현실적이란 느낌이 들 정도로 몽환적(夢幻的)인 풍경이다. 영화 촬영지로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게 되면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신성리 갈대밭은 서천군과 군산시가 만나는 금강 하구에 위치해 있다. 한산 모시로 유명한 서천군 한산면 신성리에 있어서 신성리 갈대밭으로 불린다. 오래전에는 곰개나루터로 불렸다는데 고려 말에 화약으로 왜구를 소탕했던 진포해전이 있었던 역사적 현장이라고 한다. 갈대밭의 너비는 200미터 길이가 2km에 이를 정도로 넓다... 2022. 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