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아래 실개천이 흐르고 울창한 숲이 내를 감싼다. 가끔씩 구름이 쉬었다 간다. 한껏 여유로운 풍경이다. 바람처럼 잠시 머물다 가도 좋다. 선운사는 꽃이 있어 아름다운 절이다. 봄이면 동백꽃, 여름이면 배롱나무꽃, 그리고 가을이면 꽃무릇이 붉게 타올라 절을 가득 채운다.
우람한 느티나무와 아름드리 단풍나무가 사천왕처럼 호위(護衛)하는 숲길을 지나 선운사에 당도한다. 선운사는 잎이 지고 난 뒤 꽃이 피어 상사화라고 불리는 꽃무릇 군락지(群落地)로 유명하다. 도솔천 계곡과 산비탈을 수놓는 가을 단풍도 아름답기로는 뒤지지 않는다.
사시사철 붉디붉은 꽃들이 풍성하게 피어난다지만 때를 잘 맞추지 못하면 허사다. 꽃이란 것이 또 언제 피었냐는 듯 소리도 없이 져버리니까. 이번에도 그랬다. 그 유명한 선운사 꽃무릇을 보고 싶었지만 너무 늦어 버렸다.
11월을 지척에 둔 늦가을의 선운사는 선홍색 꽃무릇은 벌써 지고 울긋불긋한 단풍이 절정을 향해 불타오르고 있었다. 꽃무릇을 보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선운사로 가는 숲길과 경내를 가득 채워주는 단풍이 있어 그나마 아쉬움을 덜 수 있었다.
선운사는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도솔산에 자리한 조계종 제24교구 본사다. 도솔산은 선운산(禪雲山)이라고도 불린다. 도솔산은 기암괴석이 많아 호남의 내금강이라고 불리는데 선운사가 한창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寮舍)가 어우러져 산 전체가 거대한 불국토를 이뤘다고 한다.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고승 검단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는데, 이곳이 신라와 백제가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였던 백제 영토였다는 점에서 검단선사의 창건설에 좀 더 믿음이 가는 게 사실이다.
절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몇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많은 절이 그렇듯 본래 선운사 자리도 용이 살던 큰 못이었다고 한다. 검단 스님이 용을 몰아내고 연못을 메워나갈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는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나았단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와 큰 못이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이 지역에 도적이 많았는데, 스님이 이들을 교화(敎化)시켜 소금을 구워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 주었다. 스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마을사람들이 해마다 봄ㆍ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갖다 바치면서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했다는 것이다. 절이 위치한 곳이 해안과 그리 멀지 않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염전(鹽田)을 일궜다고 하니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남아 있는 전각은 보물 제290호 대웅보전과 관음전, 영산전, 팔상전, 명부전 등이 있고, 대웅보전 앞에는 6층 석탑이 서 있다. 500년 수령에 높이가 6미터가 넘는 동백나무들이 대웅전을 병풍처럼 감싸며 군락을 이루고 있다. 동백나무숲ㆍ장사송ㆍ송악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참당암, 도솔암, 동운암, 석상암 등 4개의 암자가 있는데 참당암은 그 중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 지금은 산내암자로 위축되었지만 본래 참당사 또는 대참사(大懺寺)로 불리었던 큰 절이었다. 선운사가 중심도량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차츰 사세가 약화되었다.
도솔암은 신비로운 전설이 전하는 곳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새로운 세상을 갈망했던 민초들의 염원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신라 진흥왕이 만년(晩年)에 왕위를 버리고 도솔산의 한 굴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날 밤 바위가 쪼개지며 미륵삼존불이 나타나는 꿈을 꾸고 도솔암을 창건하였다고 사적기는 전한다. 미륵삼존이 꿈에 나타난 것이며, 도솔(兜率)이라는 이름 모두 이 암자가 미륵신앙으로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솔암의 서편 암벽 칠송대(七松臺)에는 높이가 13미터에 너비가 3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마애불좌상이 새겨져 있다. 화순에 있는 운주사 와불이 일어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 믿었던 것처럼 이 곳 사람들도 이 부처를 미륵불이라 부르며 현세의 고통을 견뎌냈을 것이다. 마애불의 배꼽에 신기한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고, 결국 동학농민운동 무렵에는 동학의 주도 세력들이 현세를 구원해줄 미륵을 내세워 민심을 모으려 이 비기를 꺼내가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선운사를 둘러보는 데는 그리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대웅전 주위에는 많은 연등이 걸려 있었다. 부처님 오신 날도 아닌데 이렇게 많은 형형색색의 연등이 걸려 있는 걸 보면 아마도 큰 행사가 열리는가 보다. 시선을 잡아끄는 그림에 잠시 발길을 멈춰도 본다. 시간에 쫓길 것도 없고, 다른 사람들의 재촉에 맘 급할 일도 없는 이런 여행이 참 편하긴 하다. 어쩔 수 없는 외로움은 그저 감내할 수밖에 없다.
선운사를 돌아 나오는 길, 때가 늦어 모두 져 버린 꽃무릇을 아쉬워하면서 걸었다. 도솔천 주변에도, 부도밭 가는 길에도 꽃무릇의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미당 서정주는 선운사에 동백꽃 구경을 왔다가 피지 않은 동백꽃을 아쉬워하며 막걸리집에서 마음을 달랬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선운사 동구>라는 시에서 그 마음을 미루어 봄 직하다.
선운사 골짜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시인이야 육자배기 가락에 담긴 동백꽃을 봤다지만, 나는 붉은 단풍으로 아쉬움을 달랠 노릇이다. 선운사 가을의 절정은 단풍이다. 꽃무릇 지고 난 도솔천 골짜기를 울긋불긋 물들이는 단풍이야말로 사람을 시인으로 만든다. 가을날 선운사 길을 걷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 된다. 단풍에 홀려 가을 속으로 걸어간다.
제 철을 만난 듯 불타오르는 단풍을 바라보며 깊어가는 가을을 만끽한다. 선운사에서 상가단지로 가는 길목에 미당 서정주의 시비가 있다. 느린 호흡으로 시 한편 읊어보는 것도 좋겠다. 생태숲도 거닐어 본다. 노란 단풍나무가 파란 하늘과 대조를 이뤄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작은 연못을 따라 난 생태탐방로를 걷기에 참 상쾌한 날이다. 이따금씩 불어주는 가을바람에 갈대가 몸을 맡기고 있다.
선운사 경내의 감나무에 매달려 빨갛게 익어가던 감이 기억에 남는다. 사찰 경내에서 감나무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누구도 애써 감을 따려 하지 않는다. 온전히 까치들의 몫이 되는 걸까. 그리하여 내게 선운사는 온통 붉은 빛으로 기억되게 생겼다. 백일홍, 꽃무릇과 단풍, 그리고 빨갛게 익어가는 감까지.
#선운사 #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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