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가곡 <보리밭> 중에서
이곳에 오면 절로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어릴 적엔 바람에 넘실거리는 보리밭이 참 흔했었는데 이제는 보기 힘든 진풍경이 되었으니 무상한 세월을 느끼게 한다. 그리운 풍경을 보러 발품을 팔아보는 것도 좋다. 서해 바다와 접한 고창 땅 학원농장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청보리밭을 한번 걸어보는 건 어떨까.
이 농장은 1960년대 초 전직 국무총리를 지냈던 진의종 부부가 함께 황무지였던 40만 평의 야산을 개간했다고 한다. 처음엔 뽕나무를 심어 양잠업을 했고, 70년대 들어서는 목초를 재배하여 한우를 키우다가 90년대 초에 설립자의 장남이 귀농하여 정착하면서 보리와
콩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화훼농업을 병행하면서 본격적인 관광 농업을 시작한 것이 학원농장의 발자취다. 지금이야 건강을 생각해서 일부러 보리밥을 먹기도 한다지만 예전 먹고살기 어렵던 시절에 보리밥은 감추고 싶은 가난의 표상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흰 쌀밥에 고깃국 실컷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을까.
보릿고개란 말도 있었다. 봄에 보리가 패기 전에 먹을 게 떨어지는 춘궁기가 오면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며 먹거리가 될 만한 것들은 가리지 않고 먹었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독초를 먹고 배탈이 나거나 심하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도 비일비재했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우리 아버지 세대였다니 참 세월이 많이 변하긴 했나 보다.
지금의 학원농장은 서글프고 가슴 아픈 과거를 모두 잊게 할 만큼 낭만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사방이 온통 보리의 푸른빛으로 가득하다. 이따금씩 샛노란 유채꽃과 황토의 붉은 빛이 절묘하게 어우러지기도 한다.
매년 봄이면 이곳에서 고창청보리축제가 열려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청보리밭과 메밀꽃밭, 먹거리를 제공하는 식당에다 산책로, 숙박시설까지 갖춰져 있다고 하니 일상을 떠나 이국적인 풍경을 하루 즐겨보는 것도 좋겠다.
살기 좋은 세상에 태어났음을 감사하게 여겨야겠다. 국민소득이 3만불을 넘었다고도 하고 먹을 것이 지천으로 넘쳐나는데도 끼니조차 떼우기 힘들었던 수십 년 전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부유한 시대에 우리는 과연 행복할까. 끝도 없이 이어지는 보리밭을 걸으며 문득 그런 의문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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