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을 다녀온 적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의 배경으로도 여러 차례 소개되어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곳인지라 인파로 넘쳐났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있는 잘 생긴 전나무들이며, 숲이 선사하는 상쾌한 공기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떠올릴 때면 새벽의 고즈넉함을 그려왔었다. 하지만 실제로 접한 월정사 전나무숲은 숲이라기 보단 잘 정비된 산책로에 가까웠다. 거기도 처음에는 아는 사람만이 찾는 보물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사람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면서 달라진 운명을 맞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김룡사 숲길을 홀로 걸으며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떠올렸다. 물론 이 길이 월정사나 내소사 전나무숲길처럼 유명한 곳은 아니다. 그만큼 잘 정비되지는 않았지만 절의 초입에서 보장문에 이르는 숲길의 아름다움은 월정사의 그것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
찾는 이가 드물어 한적함마저 든다. 쾌적한 숲길이 감흥을 더 해준다. 남들은 모르게 나만 아는 보물로 꼭꼭 숨겨두고 싶은 마음도 든다. 하지만 좋은 사람들에겐 자리를 조금 내어줘도 좋겠다. 감춰둔다고 올 사람들이 못 찾아오는 것도 아닐 테니 이 정도 호의는 적당하겠다.
참나무, 단풍나무, 느티나무 등이 사이좋게 어우러진 2km 정도의 숲길을 지나면 울창한 전나무숲이 나온다. 아직은 수령이 오래되지 않은데다 수세(樹勢)도 약한 편이다. 길가에 삐죽삐죽 서 있는 전봇대가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숲다운 기품을 갖췄다.
김룡사 숲길이 지금과 같은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었던 데에는 김룡사가 자리 잡고 있는 문경 운달산이 향탄봉산이었던 덕분이다. 향탄봉산(香炭封山)이란 능묘의 제향(祭享)에 쓰이던 신탄재(薪炭材)를 조달하기 위해 수목을 보호하던 산이란 뜻이다. 자연을 온전히 보존하려면 어느 정도의 규제는 불가피한 것인가 보다.
숲길을 조금 걸으면 만나는 일주문에는 홍하문(紅霞門)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붉은 노을이라니 절의 일주문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낭만적인 문구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성철 스님이 평소 즐겨 하시던 홍하천벽해(紅霞穿碧海)에서 따왔다고 한다. 붉은 노을은 푸른 바다를 꿰뚫는다는 뜻인데 용맹정진을 통해 얻는 깨달음을 말한다.
주련에 씌어 있는 문구도 예사롭지 않다. ‘이 문에 들어오거든 안다는 것을 버려라(入此門來莫存知解) 비우고 빈 그릇에 큰 도가 가득 차리라(無解空器大道成滿)’. 가벼운 마음으로 왔다 큰 깨달음을 안고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아름다운 숲길을 지나 고승대덕의 가르침을 마음에 담으면 천년고찰 김룡사를 만날 수 있다. 경북 문경시 산북면에 위치해 있는 김룡사는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로 신라 진평왕 10년(588)에 운달 스님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원래는 운봉사라고 불렀으나 몇 차례의 중건을 거쳐 1649년에 김룡사로 이름을 바꿨다.
일제 강점기까지만 하더라도 31본산의 하나였지만 지금은 직지사의 말사인지라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지지는 않은 소박한 절이다. 언제 와도 사람 소리가 많이 나지 않아서 좋다. 이 호젓한 산사를 홀로 즐기는 호사를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은 욕심일 것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그 속에 드러나지 않은 많은 것들을 품고 있는 절이다.
천 년이 넘는 세월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의 기원(祈願)을 담고 있다. 경내를 거닐며 마주치는 작은 빨래집게 하나, 구석 한켠에 놓여 있는 장독대에서 여느 사찰과는 다른 독특한 분위기도 느낄 수 있었다. 여염집 같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좀 더 정겨운 느낌이 드는 절이다.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는 곳도 있다. 절의 가장 안쪽에는 스님들의 수행을 위한 전각이 있다. 감히 범접하기 어려워 발을 돌려야 했다. 김룡사 뒤편의 소나무 숲과 파란 하늘, 그리고 사찰의 오밀조밀한 건물들이 주는 멋진 조화 역시 김룡사를 다시 찾게 만드는 매력이다.
김룡사에서 빼먹지 말고 들러봐야 할 곳이 있는데, 바로 해우소(解憂所)다. 근심을 풀어주는 곳이라는 뜻인데 쉽게 말하면 화장실이다. 요즘 웬만한 고찰들도 화장실만은 현대식으로 잘 지어 놓은 곳이 대부분이라 전통 사찰의 해우소를 경험하기란 참 쉽지 않다. 그 느낌을 제대로 느껴보려면 이곳 김룡사 해우소에 들어가 봐야 한다. 그곳에 서는 순간 강렬한 기억이 뇌리(腦裏)에 남을 게 분명하다. 정호승 시인이 격찬(激讚)했던 순천 선암사 해우소와 비견(比肩)할 만하다.
석탑이 자리해야 할 대웅전 마당에는 노주석 2기만이 덩그러니 서 있다. 밤에는 석등 대신 노주석 위에다 관솔불을 놓아두고 어둠을 밝혔다고 한다. 대웅전 공포의 처마 밑 장식인 살미가 아름답다고 한다. 살미 사이에 보일 듯 말 듯 숨겨져 있는 물고기, 다람쥐, 새, 국화, 연꽃 등 다양한 문양을 찾아보는 것도 김룡사 기행의 즐거움이 되겠다.
매번 올 때마다 걸어 다녔던 길을 벗어나 구석구석을 헤매다 보니 예전에 미처 몰랐던 석탑과 석불을 절 뒤편에서 보게 됐다. 보통은 절의 주된 법당 앞마당에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절은 독특하게도 풍수지리상 누운 소의 형상인 운불산의 맥(脈)을 보전하기 위해 일부러 응진전 뒤편에 놓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솜씨 좋은 석공의 솜씨가 아닌 토속적인 느낌이 나는 것이 마치 운주사의 천불천탑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다. 다보탑이나 석가탑이 정제되고 우아(優雅)한 예술미의 정수(精髓)를 보여준다고는 하지만 그 모습이 너무 잘 난 탓에 사뭇 귀족적이라면, 이곳의 탑과 부처는 곁에 있는 우리 이웃이 없는 솜씨지만 정성들여 만든 것 같아 더 애착이 간다.
절을 돌아 나오는 길에 시원한 계곡에 잠시 손을 담궈 본다. 물이 맑고 투명한데다 얼음장같이 차다. 한여름에도 더위를 잊을 없을 정도로 시원하다. 덕분에 휴가철이면 운달계곡은 이름난 피서지로 변모한다. 전나무숲길 못지않은 김룡사의 숨겨진 보석이라 부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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