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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그리다

산사에서 되새기는 넓고 깊은 응시의 충만함 - 봉정사

by 푸른가람 2022.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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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번잡함을 지워 보려 절을 자주 찾곤 한다. 그저 바람에 몸을 내맡기고 있노라면 산사의 적요(寂寥)를 깨우는 풍경소리와 스님의 진중한 독경소리, 목탁소리 뿐이다. 혼탁한 속세의 소리가 사위어지는 것 같아 참 좋다. 잠시나마 일상의 상념들에서 벗어나 내 안의 소리에 고요히 집중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다. 그중에서도 봉정사는 내가 사랑하는 절집으로 손꼽을 만 한 곳이다. 

봉정사는 경북 안동시 서후면의 천등산에 자리 잡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여러 기록에 따라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능인대사가 젊은 시절 대망산(천등산의 옛 이름) 바위굴에서 수도를 하고 있었는데,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바위굴에 등불을 내려 환하게 밝혀주었다 한다. 그때부터 산 이름을 천등산, 굴을 천등굴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다.

봉정사라는 절 이름에 대해서도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종이로 봉황을 접어 날리니 봉황이 이곳으로 날아와 머물렀다 하여 봉정사(鳳停寺)라 불린다. 원래 모든 이름에는 그에 어울릴만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법인데, 봉정사 역시 예외는 아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없지 않다. 오히려 봉정사가 부석사보다 창건 연대가 4년이나 빠르다는 지적이다. 굳이 시시비비를 따지기 보다는 신비로운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의 신심(信心)을 돋워 보려는 뜻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겠다.

역사적 가치로 인해 봉정사를 대표하는 건물이 된 극락전보다 대웅전에 더 눈길이 간다. 대웅전이 더 고풍스럽고 아름다워 보인다. 툇마루와 난간이 있어서인지 어느 고택에 놀러온 것처럼 편안하게 느껴진다.

대부분의 오래된 사찰이 산중에 있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이곳 봉정사의 초입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숲길 또한 무척 아름답다. 아름드리 소나무를 비롯해 오래된 나무들로 가득한 숲이 내뿜는 맑은 공기가 심신을 맑게 해준다. 몇 해 전에는 진입로를 아스팔트로 포장했는데, 차로 오가기는 편해졌지만 날것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이 사라져버려 오히려 아쉽다. 

이왕이면 숲길을 걸어 봉정사 깊은 마당까지 당도하길 권하고 싶다. 잠깐 동안의 편안함에 몸을 의지한다면 소중한 무언가를 놓쳐버릴 것이 분명하기에. 차를 타고서는 불과 몇 분이면 오르는 길을, 사방에 널린 자연에 마음을 집중하면서 한참을 걷노라면 사물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넓고 깊은 응시의 충만함에 가슴이 벅차오를 것이다.

길을 잠깐 벗어나 계곡으로 발걸음을 옮겨도 좋다. 매표소에서 왼쪽 계곡 쪽으로 가다보면 단정하게 자리 잡고 있는 누각이 한 채 있다. 원래 이름은 낙수대(落水臺)였는데, 중국 서진(西晋)시대의 시인 육기(陸機)가 쓴 “나는 샘이 명옥을 씻어내리네(飛泉漱鳴玉)”라는 시구에서 글귀를 따 명옥대(鳴玉臺)라 고쳤다고 한다.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옥구슬 구르는 소리 같다는 담양의 명옥헌이 절로 떠오르는 이름이다. 

퇴계의 숙부이자 스승이었던 이우(李堣)는 조카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한 마리 학처럼 기품 있는 땅의 기운을 지닌 이곳에 머물게 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퇴계 선생이 16살 때 봉정사에서 사촌인 이수령, 권민의, 강한과 함께 3개월 정도 독서를 했는데, 후대에 후학들이 이를 기념하여 고고한 선비의 자태를 닮은 누각을 세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퇴계 선생은 봉정사에서 친구들과 수학하던 시절을 추억하며 노년의 소회(所懷)를 봉정사서루(鳳停寺西樓)라는 시로 남기기도 했다.

영산암 앞마당은 아기자기하게 꾸미기를 즐기는 어느 사대부 집안의 마당을 보는 듯하다. 정연하고 단정해야 할 수도자(修道者)의 집 마당에 어울리지 않을 법한 화려하고 세속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퇴계 선생의 유적지인 명옥대 말고도 봉정사에는 숨겨진 보석이 또 하나 있다. 하지만 절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모르고 지나쳐 버린다. 원체 절의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모자람이 있다. 요사채 뒤편의 낮은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영산암이 바로 그곳이다. 영산암은 봉정사에 딸린 참선방이다.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촬영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화려한 볼거리가 있는 곳은 아니지만 꼭 들러봐야 할 만한 이유가 있다.

한눈에 봐도 오래된 티가 확연한 우화루 밑으로 난 작은 대문으로 몸을 숙이고 영산암에 들어서면 작은 승방이 몇 곳에 나뉘어 있다. 절의 영역에 있되, 사대부집처럼 지어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러나, 영산암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건물이 아니라 바로 마당이다. 이 넓지 않은 마당에는 수도자들이 머무는 공간인 절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인공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유홍준 교수는 영산암 마당을 두고 감정의 표정을 이렇게 많이 담은 마당을 본 적이 없노라고 얘기했다. 봉정사의 기도처인 대웅전과 극락전의 앞마당은 정연(整然)한데 반해, 영산암 앞마당은 일상의 편안함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문외한인 내 눈에도 분명 영산암은 보통의 절이나 암자에서 느껴지는 엄격한 규율보다는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삶의 흔적이 묻어난다. 봉정사 안에 있되 봉정사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영산암이란 암자 이름은 석가모니 부처가 경전을 설법하였던 영취산에서 유래하였는데, 보통은 줄여서 영산이라 부른다. 영산암으로 들어서는 우화루의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우화(雨花)란 말 그대로 꽃비를 뜻하는데 석가모니 부처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처음 설법할 때 범천왕이 감복하여 꽃을 향기로운 바람에 실어 보냈다는 것에서 유래한 말로 환생(還生)을 뜻한다. 

늦은 봄날 저녁에 꽃잎이 비처럼 쏟아지던 날의 묘한 분위기가 떠오른다. 어디가 속세인지, 어느 곳이 부처님의 세상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우화루 현판은 원래 극락전 입구에 있던 것인데 극락전을 보수하며 출입문과 벽을 허물게 되어 이곳에 옮겨달게 된 것이다. 원래 자리를 떠난 것이지만 지금 자리가 더 잘 어울리는 듯 느껴진다.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있는 반송(盤松)의 모습이 수행자의 결연한 기개(氣槪)를 드러내는 듯하다.

봉정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목조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1973년 해체 수리 때 발견된 묵서명을 근거로 건립 연대를 13세기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도 봉정사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이 바로 극락전이다. ‘목조건축(木造建築)의 박물관’이라는 칭송을 듣는 봉정사의 여러 건축물 중에서도 제일로 친다. 극락전은 배흘림기둥으로 유명한 부석사의 무량수전을 뛰어넘어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축물로 인정받고 있다. 국보 제1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봉정사를 찾는 사람들이 꼭 들러보는 필수코스기도 하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짜리 단층 맞배지붕 형태다. 우진각지붕이나 팔작지붕에 비해 단순한 구조라서 화려한 맛은 덜하다. 다소 밋밋해 보이는 극락전 앞마당의 빈 공간을 삼층석탑이 넉넉하게 채워주고 있다. 극락전은 통일신라시대 건축양식을 이어받은 고려시대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1972년에 이 건물을 대대적으로 해체․수리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역사적인 발견이 있었다.

상량문의 묵서명(墨書銘)에 공민왕 12년(1363)에 극락전의 옥개부를 중수(重修)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목조 건축물을 지은 뒤 통상 100년이나 150년이 지나면 대대적인 중수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이 기록을 근거로 학계에서는 극락전의 건립 연대를 12세기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봉정사 극락전이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축물로 인정받게 된 순간이었다.

그런데 나는 역사적 가치로 인해 봉정사를 대표하는 건물이 된 극락전보다 대웅전이 좋다. 대웅전이 더 고풍스럽게 느껴지고 아름다워 보인다. 정갈하게 쓸려진 대웅전 마당을 마치 구름 위를 걷듯 지나가는 스님의 모습에 넋을 놓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넓은 마당에 탑도 하나 없이 덩그러니 외로워 보이는 대웅전에서 만세루를 바라보는 전망 또한 시원스럽다.

봉정사 서편의 극락전이 신의 영역처럼 엄격하고 절제되어 있다면, 동쪽에 있는 대웅전은 성속(聖俗)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만세루 밑 계단을 걸어올라 마주하게 되는 대웅전의 모습 또한 일반적인 불전의 모습과는 다르다. 대웅전에는 툇마루와 난간이 있어서인지 어느 고택에 놀러온 것처럼 친근하게 다가온다. 따뜻한 느낌이다. 우리와 부처가 다르지 않으며,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이런 대목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한기가 느껴지던 겨울날이었지만 따사롭게 내리쬐는 오후의 햇살이 추위를 잊게 해주었다. 동장군이 아무리 매섭다한들 스멀스멀 스며드는 봄기운을 이길 수 있을까.

누군가는 봉정사에 오면 서로 다른 얼굴을 한 세 개의 마당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절집에서 흔히 보이는 석등과 석탑조차도 없는 대웅전의 엄숙한 마당, 극락전 앞의 정겨운 마당, 감정 표현이 도드라지게 나타난 영산암 마당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듯하다. 마당을 제대로 보아야 한옥을 제대로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는데 나는 봉정사에서 세 개의 얼굴을 보았으되, 전혀 다른 느낌의 얼굴을 보았으니 사람마다 보는 눈은 다른 법인가 보다.

비 내리던 어느 여름날 만세루 마루에 앉아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때가 생각난다. 세월은 부질없이 흐르고 만세루도 그 시간만큼 또 나이를 더 먹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깨우치고는 뒤돌아 합장(合掌)하고서 봉정사를 내려온다. 저 멀리 산마루에 봉황을 닮은 구름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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