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봐서는 엄청난 화재를 겪었던 곳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낙산사를 찾았었지만 큼지막한 불상과 바닷가 암벽 위의 암자, 그리고 푸른 동해 바다 정도만 기억에 남아 있다. 낙산사는 2005년 4월 6일에 일어난 산불로 사찰의 모든 것을 잃었었지만, 고맙게도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사상 최악이라던 고성․양양지역의 산불은 천년 고찰 낙산사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빼앗아갔다. 뉴스 화면으로 전해지던 시뻘건 불덩이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거센 바람을 타고 수십여 미터를 날아가는 불씨를 막아내기에 사람들의 힘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원통보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각들과 함께 보물 제479호 낙산사 동종도 그때 소실되었다. 쇳덩어리를 녹여 없앨 정도의 화마(火魔) 속에서도 낙산사 칠층석탑(보물 제499호)은 온전히 남아 있다. 쇠보다 강한 것이 돌인가 보다. 수많은 전란과 화재를 견디며 꿋꿋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석탑의 모습이 경이롭다. 낙산사 동종도 이듬해 복원되어 범종루에 모셔져 있다.
낙산사는 신라 문무왕 11년(671)에 의상대사가 금강산, 설악산과 함께 3대 명산으로 불리는 오봉산에 터를 잡은 이후 1,300여년의 세월을 함께 하고 있다. 낙산사라는 이름은 관음보살이 설법을 펼치며 항상 머무는 곳을 이르는 보타낙가산에서 연유했다. 그런 연유로 보타전이 해수관음상 아래에 위치해 있기도 하다.
절에서 동해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데다 동양 최대의 해수관음상, 의상대, 홍련암, 홍예문 등 많은 문화재까지 있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랑하는 절집에서 빠지지 않는다. 관음성지(觀音聖地)이자 기도를 잘 들어주는 절이란 이야기가 불자들 사이에 퍼지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강원도 동해안을 휩쓸고 간 대형 산불 탓에 많은 당우가 불타 사라졌지만 십 여 년의 세월이 흘러 풀과 나무가 되살아났고, 소실되었던 절집들도 다시금 제자리를 찾고 있다. 해수관음상 아래 바닷가 위태로운 절벽 위에는 낙산사 창건의 모태가 된 홍련암이 있는데 다행스럽게 동해안 산불 때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낙산사에서 꼭 들러봐야 할 명소가 몇 군데 있다. 먼저 낙산사의 중심 법당인 원통보전으로 향한다. 석가모니불이나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것이 보통의 절들에 비해 낙산사는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시고 있다. 낙산사가 관음성지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원통보전을 달리 관음전이라고도 부른다.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는 건칠관음보살상은 전체적으로 비례감이 좋고 얼굴 표정이 빼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고려 후기의 전통 양식을 바탕으로 한 조선 초기의 작품인데,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寶冠)은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원통보전 뿐만 아니라 그 주변이 모두 중요한 문화재로 둘러싸여 있어 발걸음을 한참동안 멈추게 한다.
법당 앞에 훤칠하게 서 있는 칠층석탑은 보물 제499호로 지정되어 있다. 칠층이라고는 해도 기층 의 높이가 높지 않아 전체 탑의 높이는 6.2미터에 불과하다. 조선 전기 석탑인데, 낙산사가 조선 세조 때 중창될 때 이 탑도 3층에서 7층으로 늘렸다고 한다. 탑의 노반 위에 놓는 엎은 주발 모양의 복발(覆鉢)과 불탑의 꼭대기에 있는 9층의 둥근 원반형 장식인 보륜(寶輪) 등의 모양을 볼 때 고려 말에 전래된 라마탑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니 흥미롭게 살펴보며 탑돌이를 해보는 것도 좋겠다.
원통보전 주위에는 그 둘레를 방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담장이 있는데 원장(垣墻)이라고 부른다. 높이는 3.7미터 길이는 220미터에 이른다. 세조가 절을 중건할 때 처음 쌓았다고 전한다. 담장 안쪽은 기와로, 바깥쪽은 막돌로 쌓았고 담장 위에는 기와를 얹어 지붕을 이었다. 둥근 화강석을 배치해 단조로운 담장에 포인트를 줬다. 부처님의 영역인 법당을 둘러싼 성스러운 공간임을 드러내면서 대구 도동서원의 담장처럼 그 자체로서 인상적인 조형물로 역할하고 있다.
의상대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의상대사와 깊은 연관이 있다. 스님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낙산사를 지을 때 산세를 살핀 자리이자 좌선(坐禪)하며 수행했던 곳이라고 한다. 홍련암 가는 길 바닷가 언덕 위에 있는데, 경관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墨客)들이 즐겨 찾았고, 지금도 낙산사를 오면 꼭 들러보는 명소가 되었다.
의상대에서의 해돋이를 보는 것은 몇 대가 복(福)을 지어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한때는 텔레비전 방송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애국가 속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기도 했었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의 장쾌한 풍경이 시원스럽다. 한낮의 번잡함이 사라진 낙산사의 밤 풍경은 또 얼마나 단아하니 예쁠까. 풍성한 보름달이 동해 바다를 비추는 고요한 순간, 마음속의 모든 번뇌 또한 짙은 심연(深淵)으로 가라앉을 것만 같다. 손에 작은 등 하나 들고 내 마음을 밝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절 구석구석을 거닐고 싶다는 마음 간절해진다.
의상대를 지나면 바닷가 작은 암자 홍련암이 나타난다. 홍련암은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한 장소로 낙산사의 모태가 된다. 의상대사는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경주에서 멀리 이곳 양양까지 왔다. 스님이 파랑새 한 마리를 만나게 되는데 파랑새가 석굴 속으로 들어가자 이를 이상히 여겨 굴 앞에서 밤낮으로 이레 동안 기도를 올렸다. 마침내 바다 위에 붉은 연꽃이 솟아나더니 그 위로 관음보살이 나타나매 암자를 세우고 홍련암이라 했고, 파랑새가 사라진 굴을 관음굴이라 불렀다.
홍예문도 빼놓지 말아야 할 명소다. 세조 임금이 낙산사에 행차해 세웠다고 하는 홍예문은 강원도의 고을을 상징하는 26개의 화강석을 무지개모양으로 쌓아 올렸다. 양양군 강현면 정암리 길가에 있던 돌을 가져다 왔다고 전한다.
기단부는 거칠게 다듬은 2단의 큼직한 자연석을 놓고, 그 위에 화강석으로 방형의 선단석(扇單石) 3개를 앞뒤 두 줄로 쌓아 둥근 문을 만들었다는 설명인데, 바라만 봐도 신기하다. 모난 돌을 쌓아 둥그런 다리를 만든 선암사 승선교의 경이로움을 다시 맛본다.
문의 좌우에는 큰 강돌로 홍예문 위까지 성벽처럼 쌓아올린 탓에 마치 사찰의 경계처럼 보인다. 홍예문 위의 문루(門樓)는 비교적 최근에 세워진 것이지만 홍예문과 썩 잘 어울려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느껴진다. 낙산사의 다양한 볼거리 중에서도 홍예문을 제일로 여기며 늘 그리워하게 되는 이유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햇살을 받으며 산을 내려간다.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절인데다 동해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기에 사시사철 발길이 끊이지 않는 낙산사. 모든 것을 태워버린 잿더미 속에서 새싹을 틔우는 자연도 위대하다지만, 소실(燒失)과 중건(重建)을 거듭하는 인간들의 의지도 그에 못지않다.
멀리 해수관음보살이 변함없이 자애로운 미소로 중생들을 내려다본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낙산사의 풍경 속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 할 만 하다. 수많은 바람을 담은 연등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거대한 우주의 시간 속 티끌 같은 존재로 찰나(刹那)를 살면서도 만년의 근심으로 살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고 비루(鄙陋)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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