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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그리다

민족시인 만해 한용운의 체취를 따라서 - 백담사

by 푸른가람 2022.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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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백담사를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백담사는 여러 이유로 유명한 곳인데, 최근에는(최근이라고 해봐야 벌써 수십 년이 흘렀다) 전직 대통령이 칩거(蟄居)했던 곳으로 세상의 이목을 한몸에 받기도 했었다. 원래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이 머물며 『조선불교유신론』, 『님의 침묵』 등을 집필한 곳으로 많이 알려졌다.

이런 연유로 백담사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내설악(內雪嶽)의 깊은 오지(奧地)에 이유로 백담사를 직접 찾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끔 영상으로 접했던 백담사 모습은 전형적인 산사의 모습 그 자체였다. 특히 한겨울 흰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찾아가는 길도 무척 험하고 가파른 심산유곡(深山幽谷)에 있는 줄로만 알았었다.

예전에는 절에 가는 것이 무척 힘들었겠지만, 지금은 마을버스를 타고 십여 분만 오르면 아주 편하게 백담사에 다다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처음 접하게 되는 백담사의 느낌이 조금 어색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비교적 넓은 하천이 펼쳐져 있고, 물길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면 바로 백담사다.

평평한 땅 위에 절이 들어서 있다. 보통의 산사들이 가파른 지형 탓에 높다란 단을 쌓아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곤 하는데 백담사는 그런 수고는 할 필요가 없다. 설악산 골짜기의 물줄기들이 모여드는 백담계곡에서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흘러내려 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성싶다. 큰 물지게를 지고 가파른 산을 오르내리는 스님들의 모습을 상상했었는데 실제 모습은 그렇지가 않았다.

설악산 골짜기의 물줄기들이 모여드는 백담계곡에서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흘러내린다. 하천 바닥에는 수를 셀 수도 없을만큼 많은 돌탑이 세워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돌탑에 올려진 돌 하나하나마다 사람들의 서원이 담겨있을 것이다.

하천 바닥에는 수를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돌탑이 세워져 장관(壯觀)을 이루고 있다. 수많은 돌탑에 올려진 돌 하나하나마다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의 서원(誓願)이 담겨있을 것이다. 한여름이면 지금보단 훨씬 많은 물이 흘러 시원함을 안겨줄 것 같다. 여름철마다 집중호우로 인해 강원도 인제에 많은 피해가 났다는 소식을 접하곤 하는데 이곳도 그리 안전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백담사는 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로 신라 진덕여왕 1년(647)에 자장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는 한계령 부근의 한계리에 절을 짓고 한계사라 불렀는데 이후 수차례 절이 불에 타 옮겨 짓다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게 된 것이라 한다. 백담사라는 이름은 설악산 대청봉에서 절까지 작은 담(潭)이 100개 있는 지점에 절을 지었다 해서 붙었다고 한다.

「심원사사적기」에는 여러차례 절의 위치가 옮겨진 것과 관련된 전설이 남아 전한다. 낭천현(狼川縣)의 비금사(琵琴寺) 주변에는 산짐승들이 많아 각지에서 사냥꾼들이 많이 찾아들었다고 한다. 절의 승려들은 이 때문에 물이 더러워진 것도 모른 채 샘물을 길어 부처님에게 공양(供養)하였는데, 이를 염려한 산신령이 하룻밤 사이에 절을 설악산 대승폭포 아래의 옛 한계사 터로 옮겼다는 이야기다.

지금까지도 이 지역의 어르신들은 춘천 부근의 절구골, 한계리의 청동골 등의 지명이 절을 옮길 때 청동화로와 절구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고 한다.

질곡(桎梏)의 우리 역사만큼이나 백담사도 이런저런 사연이 많은 사찰인 것 같다. 현재 모습은 한국전쟁 때 불탔던 것을 1957년에 중건한 것이라 한다. 새로 지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지 산사 특유의 고풍스러운 느낌은 나지 않는다. 절 한 켠의 만해기념관과 만해 동상 등이 백담사와 한용운의 인연(因緣)을 드러낸다.

만해 한용운은 일제에 항거한 민족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7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1903년에 불가에 입문했다. 법호는 용운, 자호와 필명은 만해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하다 3년간 옥고(獄苦)를 치르기도 했다. 많은 인사들이 변절(變節)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독립운동과 불교계 혁신에 한평생을 바쳤다. 조용히 소리 내어 <님의 침묵>을 읊조려 보며 한 시대를 불꽃같이 살다간 위대한 인물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것도 좋겠다.

현존하는 부속 암자로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이 창건하여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함으로써 전국의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한 곳이 된 봉정암, 자장이 선실(禪室)로 사용하기 위해서 창건했으나 뒤에 다섯 살짜리 동자가 관세음보살을 부르다가 견성(見性)한 곳이라 하여 절 이름을 바꾼 오세암이 유명하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라는 우스개소리로 유명한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2리에 절이 있다. 예전에는 교통이 불편해 찾기 어려운 곳이었지만 도로가 새로 뚫려서 동에서도 서에서도 찾기가 많이 수월해졌다. 서울에서도 불과 2시간 30분이면 용대리에 당도할 수 있으니 옛사람들이 보면 천지개벽(天地開闢)할 일이다.

절에 가면 남들처럼 법당에 들러 부처님께 절도 올리고, 간절한 바람을 담은 돌탑도 하나 쌓아보아야 하는 법인데, 아직은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는 없는 것 같다. 하기야 함께 간 일행들이 있으니 내 뜻대로 여유 부릴 형편도 아니었다. 혼자서 다시 찾아보리라는 다짐을 하고는 잠시 쉬었던 발걸음을 재촉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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