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봄바람 불어오는 3월의 어느 날에 무작정 산청으로 발길을 옮긴 이유는 산천재 때문이었다. 지리산 자락 아래 산청 고을에 자리 잡고 있는 남명 조식의 옛집 산천재 역시 『철학으로 읽는 옛집』이란 책 덕분에 다녀온 여정 가운데 한 곳이다.
책 표지에 담긴 산천재의 모습은 따사로웠다. 몇 채 되지 않는 건물과 너른 마당을 주인처럼 자리 잡고 있는 매화나무 한그루가 주는 충만함은 묘한 끌림이 있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산천재를 향한 짝사랑은 몇 달이 지나서야 겨우 그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때마침 5백 년도 훨씬 넘은 유명한 남명매(南冥梅)가 화사한 꽃망울을 터뜨려 멀리서 찾아온 빈객을 맞아주고 있었다.
실제 본 산천재는 전체적으로 좀 더 휑한 느낌이 들었다. 흑백 사진 속의 모습과 달리 고운 단청으로 칠을 해놓은 산천재는 뭔가 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솔직히 불편했다. 함성호 시인이 산천재를 찾은 이후 이곳에도 관리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느껴진다. 관리의 필요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지나친 관심은 고유의 매력을 훼손할 수도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탐매(探梅)라는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매화꽃이 필 때가 되면 매화 향기를 좇아 떠나는 유람이 바로 그것인데 내겐 그런 고매한 풍류를 즐길만한 자격은 없는 듯하니 그저 수백 년 세월을 피고 진 끈질긴 생명력과 두둥실 떠가는 흰 구름을 배경 삼아 피어난 아름다운 꽃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성 싶다.
산천재 자체는 아주 작은 집이다. 하지만 바로 옆을 흐르는 덕천강과 산천재에 앉으면 눈앞에 우뚝 서 있는 지리산 천왕봉까지 산천재의 공간 속으로 품어 안고 있어 넉넉한 호연지기를 느낄 수 있다. 그 옛날 남명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산천재 마루에 한참을 앉아 쉼 없이 흐르는 덕천강 물줄기와 천왕봉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뭔가 모를 뭉클함이 몰려 왔다.
산천재 마루 벽에는 중국 요임금이 권하는 임금 자리마저 마다하고 오히려 자기의 귀가 더러워졌다 하여 영수에 가서 귀를 씻고 기산에 들어가 지냈다는 중국의 대표적 은사(隱士) 허유의 고사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평생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만 전념하는 처사의 삶을 살았던 남명의 고매한 삶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봤다.
건축가 함성호는 산천재의 풍수를 두고 ‘지리산을 마당에 앉힌 집’이라 표현했다. 정말이지 산천재가 지닌 특징을 한마디로 잘 정리한 탁월한 어휘의 선택이 아닐까 싶다. 책에서 보았던 모습은 빛바래고 퇴색한 것이었는데 지금의 산천재는 억지로 늙은 얼굴에 화장을 한 것처럼 어색하다. 늙고 퇴락해가는 모습 그대로 두는 것이 칼과 방울을 차고 처사(處士)의 모습을 지키려 했던 남명의 뜻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산천재를 둘러보았으니 덕천서원으로 발길을 옮겨 본다. 덕천서원은 산천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덕천강 강가에 자리 잡고 있다. 수령 4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입구에서 나그네를 반겨 준다. 늦가을이면 온통 노란 빛으로 물들 덕천서원의 풍경을 잠시 상상해 본다.
솟을대문인 시정문(時靜門)을 들어서면 덕천서원의 아담한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무척 마음에 들었던 덕천서원의 첫인상이었다. 서원들이란 것이 인적이 드문 곳에 세워지게 마련인데 이 덕천서원은 조금 번화한 느낌이다. 물론 이 서원이 처음 세워졌던 1576년 당시에는 지금과 달랐겠지만 인근에 학교도 있고 큰길도 새로 나 한적함과는 거리가 있다.
이따금씩 차 지나는 소리도 들리고 담장 너머 학교에서 들리는 소리도 끊임이 없지만, 이상하게도 마음만은 고요한 느낌이다. 덕천서원 마루에 앉아 하염없이 흘러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던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끊임없이 세상의 소리가 들려오지만 마음속에서는 그저 고요함만이 머물던 그때의 묘한 느낌이 참 좋았다.
처음 덕천서원을 들어서자마자 잘 정돈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덕천서원 역시 전형적인 서원의 배치 그대로다. 정면에 강당 격인 경의당(敬義堂)이 자리 잡고 있고 양쪽에 동재와 서재가 있다. 동재 옆에는 큰 배롱나무를 심었는데 여름철이면 붉은 배롱나무꽃이 만개하면 무척 화사한 풍경을 선사해 줄 것 같다.
덕천서원은 남명 조식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76년 최경영, 하항 등의 사림이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02년에 중건했고 광해군 1년에는 나라에서 덕천(德川)이라는 현판과 토지, 노비를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인조반정 등을 겪으며 모진 풍파에 시달려야 했던 것은 남명 조식의 삶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덕천서원 바로 곁에 세심정이 있다. 세심정은 덕천서원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을 위해 덕천강 강가에 세운 정자인데 그 경관이 통상의 정자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탁월하지는 않다. 강가에 서서 수백 년 전 이곳의 풍경을 잠시 떠올려 본다. 주역의 성인세심(聖人洗心)에서 따온 정자의 이름처럼 이런저런 탁한 생각으로 더럽혀진 마음도 강물에 깨끗하게 씻길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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