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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그리다

선분홍 꽃구름 아래 떠나간 이를 그리워하노라 - 담양 명옥헌

by 푸른가람 2022.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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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은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매력을 지닌 고을이다. 어렸을 적에는 대나무가 많이 나는 고장이라 배웠고, 나이를 먹어서는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 관방제림, 죽녹원 등 훌륭한 볼거리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편의 영화를 통해 소쇄원이라는 아름다운 곳을 알고부터는 담양을 누원(樓園)의 고장이라 부르고 싶어졌다. 무등산 자락에 맞닿아 있는 이 고을에는 참으로 많은 누각과 원림들이 자리 잡고 있다.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담양의 누각과 원림을 소개하며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라고 표현한 바 있다. 시가(詩歌) 문학의 중심지답게 수많은 누각, 정자와 원림이 담양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송강 정철의 흔적을 되살펴 볼 수 있는 송강정, 면앙정을 비롯해 소쇄원, 환벽당, 취가정, 식영정까지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다. 그런 까닭에 옛 건축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거나 시문을 공부하는 국문학도들에겐 빼놓지 말아야 할 제일의 답사코스로 꼽히기도 한다.

배롱나무꽃이 필 무렵이면 생각나는 곳이 명옥헌 원림이다. 명옥헌은 오명중이 젊은 나이에 요절한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인데, 가운데 방을 두고 사방은 마루로 되어 있다.

하지만 명옥헌은 상대적으로 그리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정자에는 명옥헌(鳴玉軒), 삼고(三顧)라고 적힌 현판만 조촐하게 걸려 있을 뿐이다. 이름난 시인묵객들의 분에 넘치는 칭송도 없다. 담양의 정자들이 하나같이 아름다운 풍광으로 우열을 다툴 때에도 명옥헌은 그저 묵묵히 제 자리를 지켰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고 카메라가 대중화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신비롭고 고요한 자태를 숨기고 있었을 것이다. 명옥헌이 세상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이 다행스럽기도 하지만, 한편 아쉽기도 하다.

삼고(三顧) 현판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옛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리석은 어버이 선조를 대신해 분조(分朝)를 이끌며 임진왜란을 힘겹게 수습했던 세자 광해군은 왕위에 올라서도 살얼음판 같은 국제 정세 속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야만 했다. 현명한 실리외교를 폈다는 후세의 평가에 반해 내치(內治)는 집권 후반기에 갈수록 어지러웠다.

인륜을 저버린 폭정으로 광해군이 민심을 잃어가자 조카 능양군과 그를 지지하는 신하들의 세력은 더욱 커져갔다. 능양군이 왕자 시절 담양을 찾았다가 학문과 인품이 뛰어난 오희도의 명성을 듣고 도움을 청했다.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후산마을을 세 번이나 찾았지만 노모를 봉양(奉養)해야 했던 효자 선비의 굳은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한다. 명옥헌에 외로이 걸려 있는 편액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유비와 제갈량의 삼고초려(三顧草廬) 고사가 절로 떠오른다.

봄꽃의 화려한 향연이 끝나고 녹음이 우거지는 우리네 여름 풍경은 지루하기만 하다. 한여름 작열하는 태양 아래 무더위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 있으니 활짝 핀 배롱나무꽃의 선분홍빛 꽃구름이다. 배롱나무꽃이 필 무렵이면 생각나는 곳이 바로 명옥헌 원림이다. 이때를 기다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여름 휴가철과 맞물려 이맘때 명옥헌은 유명 관광지 부럽지 않다.

명옥헌은 후산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난 골목길의 끄트머리에 있다. 서른 가구 남짓의 호젓한 마을이다. 오래된 기와집 사이로 몇 해 사이에 새로 지은 전원주택들이 드문드문 성글다. 마을 초입에 우뚝 서 있는 느티나무를 지나면 담벼락을 따라 소박한 벽화들이 반겨준다. 조금 더 걸어가 나지막한 언덕을 지나면 명옥헌 원림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대문도 없고 담장도 없이 온통 붉게 타오르는 배롱나무꽃에 감춰졌던 비경(祕境)이 마침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원림을 꾸민 이는 조선 후기의 학자 오명중(1619~1655, 호는 以井)이다. 그의 아버지 오희도(1584~1624, 호는 明谷)는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방에 가두고 불을 때 죽인 사건으로 인조반정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라는 광해군의 광기(狂氣)를 피해 외가가 있는 이곳에 망재(忘齋)라는 작은 서재를 짓고 어지러운 세상을 등진 채 글로 소일하며 지냈다.

이 망재가 훗날 명옥헌의 원형(原型)이라고 볼 수 있다. 인조반정 후에는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지만 1년 만에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붉게 타오르는 듯 아름답게만 보이는 풍경 뒤에 이토록 애달픈 역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마흔하나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오명중은 아버지가 생전에 살던 곳에 정자를 짓고 명옥헌이라 불렀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인데, 가운데에 방을 두고 사방은 마루로 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마루가 다른 정자보다 높은 편이라서 난간을 사방으로 둘렀다. 정자 아래에는 네모난 연못을 파고 주변의 개울에서 물을 끌어 들였다. 아름다운 꽃나무도 심었을 것이다. 지금은 배롱나무와 소나무 수십여 그루가 믿음직하게 자라나 주변을 담장처럼 둘러싸고 있다.

우리나라의 이름난 옛 정원을 보면 연못이 네모난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 정궁이었던 경복궁의 경회루가 놓인 연못이 그렇다. 우리나라 3대 정원 가운데 한 곳으로 손꼽히는 영양 서석지 역시 연못이 방형으로 생겼다. 우리네 선조들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하늘은 둥글고 세상은 모나다고 여겨 연못을 네모나게 만들었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옛 사람들의 생각은 얼추 비슷했던 모양이다. 조선시대 조성된 정원들은 네모난 연못 한가운데 둥근 섬 하나를 만들어 꽃나무를 심었다.

배롱나무꽃은 피었을 때 화려함을 뽐내지만, 연못에 떨어져서도 애잔한 감성을 일깨운다. 선분홍빛 꽃잎들이 수면 위에서 다시 피어나는 듯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잡는다.

정자의 이름은 서쪽 계곡에서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마치 옥구슬이 부딪쳐 새 울음소리처럼 들린다 하여 명옥(鳴玉)이라 하였다.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소쇄원 못지않게 명옥헌이라는 이름도 참 아름답지 않은가. 뜻도 좋고 부르기에도 좋은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사람에게나, 꽃에게나, 혹은 이런 건물에게도 무척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세속의 소리가 사라지면 혹여 옥구슬 소리가 들릴까 하여 썰물처럼 인파가 빠져나간 정자에 앉아 귀 기울여 보곤 한다.

예전엔 정원이란 용어를 흔하게 사용했다. 정원(庭園)은 인간의 구미에 맞게 인위적으로 조성한 공간을 뜻하지만 원림(園林)은 자연 형태를 유지하면서 인공적인 요소를 조금 가미한 곳을 의미한다. 인공적으로 연못을 파내고, 아기자기한 동산을 만드는 일본식 정원과 원림과는 큰 차이가 있다. 작은 개울의 물길을 조금 틀어 안으로 끌어들였다가 다시 개울로 돌려보내는 명옥헌의 연못을 통해 자연을 대하는 우리 조상들의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다.

명옥헌은 소쇄원과 달리 원림(苑林)이라 표기하는데, 담장이 있고 없고의 차이라고 한다. 소쇄원처럼 주위에 담장을 둘러 개인의 사적 공간으로 삼으면 원림(園林)이 되고, 숲을 담장으로 삼은 명옥헌은 원림(苑林)이 되는 것이다. 담장이 없었기에 이곳은 지체 높은 양반 사대부로부터 밭일하던 아낙네까지 품어 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넉넉함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래서 고마운 곳이다. 덕분에 우리는 명옥헌 정자에 앉아 땀을 식힐 수도 있고, 한여름 꽃의 향연(饗宴)을 마음껏 즐길 수도 있는 것이다. 불과 여섯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윈 오명중이다. 그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팔 때에는 지금과 같은 모습을 예상하진 못했겠지만 그의 지극한 효심만은 천년이 지나도 그 향기를 잃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배롱나무꽃은 피어있을 때도 아름답지만 바람에 흩날려 연못에 떨어진 꽃잎도 애잔한 감성을 일깨운다. 선분홍빛 꽃잎들이 수면 위에서 다시 피어나 무심히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잡는다. 뭔지 모를 아쉬움에 그리운 이의 얼굴을 꽃잎으로 그리며 한참을 머문다. 배롱나무꽃의 꽃말은 ‘떠나간 벗을 그리워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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