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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그리다

가파른 암벽 위에 놓인 섬진강 가의 작은 암자, 사성암

by 푸른가람 2020.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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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이 굽이굽이 돌아가는 고을, 구례라는 이름만 들어도 정겹습니다. 고운 모래가 가득한 섬진강은 문학 속에 자주 등장하곤 했습니다. 진안과 장수의 경계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지리산 남부의 협곡을 흘러 내려오다 구례와 하동에서 비로소 큰 강의 면모를 드러내게 됩니다. 이젠 이렇게 고운 모래가 흐르는 강을 보기 어려워졌습니다. 누군가를 섬진강을 두고 여인의 속살같이 곱고 부드럽다고 했습니다. 강폭이 그리 넓지 않아 강 건너편을 향해 소리치면 누군가 반갑게 손을 흔들어줄 것 같기도 합니다.

섬진강을 따라 끊어질 듯 이어지는 19번 국도는 우리나라에서 아름답기로 으뜸가는 길입니다. 봄이면 화려한 십리벚꽃길로 변신하고, 가을이면 울긋불긋 단풍의 향연으로 옷을 갈아 입지요. 절로 눈호강을 시켜주는 고마운 길입니다. 봄이면 강둑을 따라 벚꽃이 만개해서 눈이 내린 듯 아득하기만 합니다. 그 무렵이면 따뜻한 봄기운에 취하고 바람에 흩날리는 꽃비에 젖어 들기 마련입니다.

벌써 몇해가 흘렀던가요. 밤새 무참히 내리던 봄비가 그친 어느 새벽이었습니다. 섬진강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지는 19번 국도를 따라 달리던 길에서 차창 너머 섬진강이 실어온 봄내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가을 풍경은 또 어떨까요. 가녀린 몸뚱이를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드는 코스모스의 모습이 마치 반가운 이를 만난 것처럼 다정스럽습니다. 어떤 것은 희고, 어떤 것은 타오르듯 붉고, 또 어떤 것은 발그레 달아오른 처녀의 볼을 닮았습니다.

지리산 골짜기에서 흘러 내린 물들이 하나로 모여 구례, 하동, 광양 고을을 지나며 남해에 다다릅니다. 바다와 가까운 탓에 섬진강은 다양한 생명들을 품어 안은 어머니의 따뜻한 품과 닮았습니다. 강에서 나는 재첩은 그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렸겠지요. 

섬진강에 가면 맨발로 모래의 감촉을 느껴보아야 합니다. 발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며 간지럽히는 가녀린 모래 알갱이들은 유년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줍니다. 어릴 적 집에서 몇 걸음만 뛰어나가면 고운 모래가 가득한 냇가가 있었습니다. 좋은 놀이터였지요. 사시사철 냇가에서 살았습니다.

밤이면 횃불 들고 고기 잡아 매운탕 끓여먹던 기억이며, 친구들과 물장구 치며 놀던 기억이며, 온몸에 진흙을 묻혀서는 시냇물로 뛰어들던 기억까지(요즘 유행인 머드팩을 이때 이미..). 어린 시절의 기억은 온통 냇가와 관련된 것들 뿐입니다.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순간입니다. 어쩌면 섬진강은 잃어버린, 혹은 잊어버린 유년기의 행복을 떠올려주는 보물창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름이 가까워졌는지 섬진강에도 크고 붉은 달이 떠올랐습니다. 달이 떴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싶은 그런 밤이네요.

섬진강이 도도한 흐름을 드러내는 구례군 문척면오산 봉우리에 사성암이 있습니다. 원래는 오선암으로 불리다가 원효대사, 도선국사, 진각국사, 의상대사 등 네 명의 고승이 수행했던 곳이라 해 사성암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오산은 해발 530미터에 불과하지만 사방이 한 눈에 들어와 풍광이 무척이나 훌륭합니다.

사성암 뒤편으로 난 산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발아래로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흐르는 섬진강의 환상적인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절로 탄성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순간입니다. 절벽 위에 위태로이 서 있는 절집도 매력적이지만, 사성암의 참다운 매력은 섬진강의 품에 안온하게 안긴 구례 읍내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그 풍경을 두고 산 아래로 내려오기 싫어질 정돕니다. 몇 날 며칠을 두고 보아도 지겹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사성암을 오르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들 합니다. 첫 번째는 유리광전에 모셔져 있는 마애약사여래불을 보려는 것이고,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준다는 소원 바위에 간곡한 마음을 의탁해 보고 싶어일 테고, 마지막은 바로 지리산과 섬진강, 구례의 풍성한 들을 한 눈에 보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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