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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그리다

맑은 차와 붉은 동백꽃에 다산의 숨결 흐르네 - 백련사

by 푸른가람 2023.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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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중순쯤 남도 쪽을 한 바퀴 돌아볼 생각이었는데 한 달이나 늦어 버렸다. 이미 동백꽃은 다 지고 없으리라. 하동의 섬진강가에는 벌써 벚꽃이 한창이었으니 붉은 백련사의 동백꽃은 1년을 기다려야 다시 볼 수 있겠거니 했는데 이게 웬걸 백련사 들어가는 초입에 동백꽃이 한창이었다.

바람에 흩날려 땅에 떨어진 붉은 잔해들도 많았지만 여전히 강렬한 색채로 싱싱한 매력을 뽐내고 있는 꽃들도 한가득 이었다. 푸른 나뭇잎과 붉은 꽃잎의 대비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백련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이 동백나무숲은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봄이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이 아름다운 동백나무숲을 제 정원처럼 가지고 있는 백련사는 참 복 받은 절이 분명하다. 백련사를 오르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향하는 길을 만나게 된다. 이곳 강진과 백련사는 다산 정약용이라는 인물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백련사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인데 추녀마다 4개의 활주를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다. 전면 두 개의 주두에는 용두를 장식해 화려한 모습이다. 현판의 글씨는 동국진체의 대가인 해강 김규진이 쓴 것이다.

생의 대부분을 이곳 강진에서 유배생활로 보냈으니 그의 한(恨)이 땅 곳곳에 남아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다산은 강진에 유배(流配) 내려와 백련사 인근 다산초당에서 기거했는데, 백련사 주지로 있던 혜장선사와 종교와 나이를 초월한 애틋한 우정을 나눈 것으로 유명하다. 두 사람은 1805년 봄에 처음 만나서 1811년 가을에 혜장선사가 죽을 때까지 6년 반 동안 깊이 사귀었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에 이르는 산길을 홀로 걸으며 다산과 혜장선사의 각별했던 우정을 생각해 본다. 서로를 만나러 두 사람은 이 길을 수도 없이 걸었을 테지. 불가에 귀의했지만 유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혜장선사가 있었기에 다산은 유배 생활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첫 만남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신유박해(辛酉迫害)로 형 정약종이 처형당하고 정약용은 강진으로 귀양을 오게 되는데 잠자리를 제공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동문 밖 주막의 노파가 작은 방 한 칸을 내준 덕분에 겨우 몸을 의지할 수 있었다. 

백련사 오르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다산초당으로 향하는 길을 만나게 된다. 다산은 강진에 유배 와 백련사 인근의 다산초당에서 기거했는데, 백련사 주지로 있던 혜장선사와 종교, 나이를 초월한 애틋한 우정을 나눈 것으로 유명하다.

다섯 해가 흘러 1805년 봄 바깥출입이 자유로워진 다산은 백련사를 들르게 된다. 서른네 살의 혜장선사가 주지로 있었다. 한나절 동안이나 대화를 나누었지만 열 살 아래인 혜장선사가 다산을 알아보지 못했다. 다산이 암자에서 하룻밤을 자려고 길을 나서는데, 혜장이 그제야 다산을 알아보고 자기 거처로 모셨다. 그날 밤 다산과 주역(周易)을 논하던 혜장이 다산의 날카로운 질문을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는 스승으로 극진히 모시면서 정성을 다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깊은 교류는 1811년 가을 혜장 선사가 술병이 들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며 안타깝게 끊기게 된다. 형제 같은 혈육의 정을 나누었고, 깊은 진리의 세계를 논했던 벗을 잃은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동백꽃의 붉은 빛깔이 그래서 더욱 아련하게 느껴진다. 다산은 만시(輓詩)를 지어 지기(知己)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름은 중(僧) 행동은 선비라 세상이 모두 놀라거니
슬프다, 화엄의 옛 맹주여.
논어 책 자주 읽었고
구가의 주역 상세히 연구했네.
찢긴 가사 처량히 바람에 날려가고
남은 재, 비에 씻겨 흩어져 버리네.
장막 아래 몇몇 사미승
선생이라 부르며 통곡하네.
푸른 산 붉은 나무 싸늘한 가을
희미한 낙조 곁에 까마귀 몇 마리
가련타 떡갈나무 숯 오골(傲骨)을 녹였는데
종이돈 몇 닢으로 저승길 편히 가겠는가.
관어각 위에 책이 천권이요
말 기르는 상방에는 술이 백병이네
지기(知己)는 일생에 오직 두 늙은이
다시는 우화도 그릴 사람 없겠네.


백련사는 통일신라시대 말기인 문성왕 1년(839)이 무염 스님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에 자리 잡고 있는데 산 이름을 따 처음엔 만덕사로 불렸다. 백련결사를 맺어 수행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이후 백련사로 개칭하였다.

고려 후기 무신정권 시기에 접어들면서 세상은 혼란해졌고, 몽고와 왜구의 침탈이 거듭되면서 백성들은 삶의 희망을 잃었다. 고난의 시대에 원묘국사 요세 스님은 쇠락해져 가던 백련사를 중창하면서 절망 속에서 희망의 시대를 열어 가고자 했고, 현세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여 주는 결사운동을 벌였다. 백련결사는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남도 땅끝에서 민중들과 함께 참회와 염불수행을 통해 정토세계를 염원하는 민간 결사운동이었는데, 120여 년간 크게 번창하였다. 

백련사 들어가는 길에 동백꽃이 한창이다. 남도의 땅끝에서 만나서인지 더욱 반갑다. 붉디붉은 동백꽃은 땅에 떨어져 그 생명이 사위어갈 때 불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백련사 동백나무숲은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봄이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과 왜구의 침탈까지 겹쳐 폐사 지경에 까지 이르렀으나 세종대왕의 형님인 효령대군은 왕위를 동생에게 넘겨주고 전국을 유람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이곳 백련사에서 8년간이나 기거하면서 큰 불사를 일으켜 사세를 많이 확장했다고 전한다. 여러 채의 당우를 세우는 한편 왜구의 침입에 맞서 행호토성도 쌓았다 한다.

백련사는 작고 소박한 절이다. 절터도 그리 넓지 않고 남아 있는 당우도 대웅전, 시왕전, 나한전, 만경루 등 몇 채에 불과하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내게는 지금껏 다녀본 그 어떤 사찰보다 크고 웅장한 곳이라 여겨진다. 아마도 절에서 지척으로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강진만(康津灣)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물론 절에서 푸른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절은 여럿 있다. 강원도 동해안의 낙산사나 등명락가사가 그렇고, 부산의 해동용궁사는 아예 바다에 접해 있다. 그런데 시원스러운 동해의 푸른 바다와 이곳 백련사 마당에서 내려다보이는 강진만의 바다 풍경은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좀 더 포근하고 다정한 느낌이라고 할까. 마치 이곳 사람들의 심성을 꼭 빼닮아서일까.

절 앞에는 비자나무와 후박나무와 함께 동백나무숲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다산초당과 넓은 차밭, 붉디붉은 동백나무숲이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채 오롯이 남아 있다. 백련사에 들러서는 다산과 혜장선사의 깊은 우정을 깊이 헤아려 보자. 내게는 그런 깊은 울림을 함께 나눌 인연이 있는지. 과연 나는 그럴만한 자격을 지니고 있는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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