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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그리다

부처님과 무언(無言)의 대화를 나누다 - 수덕사

by 푸른가람 2023.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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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는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절이었다.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오래된 목조건축물인 대웅전이 있고 공주 마곡사와 더불어 충남을 대표하는 큰 절이기 때문이다.

역시 그랬다. 조계종 7교구 본사답게 큰 절이고, 워낙 이름난 절이다 보니 찾는 이도 많았다. 넓은 주차장을 지나면 입구에서부터 수많은 식당과 상가들로 번잡하다. 잘 정비된 모습이 여느 유명 관광지 못지않았다. 원치 않았던 풍경이 수덕사로 향하는 발걸음을 잠시 머뭇거리게 했다.

하지만 예산 여행에서 수덕사를 빼놓을 수는 없다. 덕숭산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수덕사는 백제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나 뚜렷한 기록은 없으며 고려 말 공민왕 때에 나옹이 중수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 시절인 19세기에조차도 사세(寺勢)가 미약했으나 한말에 경허가 머물며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키고 그 제자 만공이 중창하여 지금은 불교계 4대 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이 있다.

덕숭산은 해발 495미터의 높지 않은 산이다. 더욱이 수덕사가 높은 자리에 있어 수덕사에서 덕숭산 정상을 오르는 데는 큰 부담이 없다. 산 정상에 오르면 홍성 일대가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펼쳐져 장관(壯觀)을 선사한다. 수덕사를 찾는 또 다른 이유기도 하다.

선방(禪房)을 끼고 돌아가면 대웅전이 나타난다. 대웅전은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남향하여 앉아 있다. 장대석을 쌓아 이룬 축대 위에 의젓하게 앉은 이 건물은 1308년에 세워진 것으로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고풍스러운 한자 일색인 여느 사찰과 달리 수덕사 일주문의 현판은 한글로 씌어져 있어 이채롭다. 양각으로 새겨진 ‘덕숭산 덕숭총림 수덕사’란 글씨가 정겹다. 둘레가 사람 몇이 팔을 벌려도 남을 것 같은 우람한 기둥이 제일 먼저 반겨준다.

잘 정돈된 길가의 풍경이 마치 그림 같다. 신록을 더해가는 숲에 한껏 피어난 연산홍의 붉은빛이 군데군데 물감을 흘려놓은 듯하다. 이 멋진 풍경을 즐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곳에 온 보람은 충분히 있다.

이 멋진 꽃길을 따라 올라가면 어떤 풍경을 만나게 될까. 너무 급하지 않게, 느린 걸음으로 이 길을 걸어보면 좋겠다. 혹여나 다음에 다시 수덕사를 찾게 된다면 이 길 끝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봐야겠다. 길을 걸으며 재미난 조각 작품들도 만날 수 있다. 어린 시절 키 쓰고 소금 얻으러 다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조각상은 수덕사 여행의 또 다른 볼거리다. 

일주문을 지나면 황하루로 오르는 긴 계단이 나 있다. 그러나 계단을 통하지 않고 오른쪽으로 흙길을 따라 올라가면, 1995년부터 중창 불사해 최근에 완공한 황하루 건물을 볼 수 있는데 대웅전을 본뜬 모습이다. 

옛 건물을 따랐으나 이전의 멋스러움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는 것은 세월의 무게가 실리지 못한 탓일까? 황하루 뒤쪽으로는 돌계단이 엉거주춤 걸려 있어 위태로워 보이는데다 눈에도 거슬린다. 불사(佛事) 이전의 아늑함이야 못 살리겠지만 제대로 자리 잡힌 모습이라도 빨리 되찾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둔덕을 올라 마주하는 조인정사 앞에는 통일신라시대 때의 균형감 있는 삼층석탑이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인 이 탑은 비례가 깔끔하여 여느 절에서라면 꽤 대접을 받았겠지만 수덕사에서는 그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는 상수(上手)라면 눈여겨 볼만 하다.

선방을 끼고 돌아가면 기품 있는 대웅전이 나타난다. 대웅전은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남향하여 앉아 있다. 장대석을 쌓아 이룬 축대 위에 의젓하게 앉은 이 건물은 1308년에 세워진 것으로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1937년에 해체 수리를 할 때 중수연대가 적힌 붓글씨가 발견되어 이 건물의 나이를 알게 되었다. 건립연대가 분명하여 우리나라 고건축의 기준이 되며 그 역사성과 아름다움으로 하여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찰나의 삶을 살지만 이처럼 오래된 목조건축물을 보며 유구(悠久)한 역사를 느껴보는 것도 가치 있는 여행이 될 수 있겠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다른 건물이 정면이 더 넓은 것과는 구조적인 면에서 다른 특색을 보인다. 그러나 건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정면은 한 칸에 문짝이 셋이나 달리도록 칸살이 넓고 옆면은 칸살이 매우 좁다. 그래서 대웅전은 비교적 정사각형에 가까운 편이다. 이처럼 정면 칸살이 넓은 것은 들이 넓어 개방적인 충청남도 지역 건축의 한 특성이다.

이 건물이 고식(古式)을 보여 주는 특징 하나는 기둥이 뚜렷한 배흘림을 하고 있는 점이다. 대웅전 옆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고주(高柱)를 보면 그 특징이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또 한 가지는 공포 구성이 주심포라는 점이다. 기둥 위에만 공포를 두어 지붕의 무게를 받는 주심포 양식은 화려하지 않은 건물에 썼으며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 건물에 주로 남아 있다. 

공포가 단순하지만 지붕이 큰 편이어서 맞배지붕으로 엄정(嚴整)하게 처리했다. 맞배지붕과 11량의 아름다움은 옆에서 보면 잘 드러난다. 지붕의 무게가 기둥에 골고루 분산(分散)되어 전달되도록 짠 각종 부재들이 구조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장식적인 기능을 더해 보는 이를 즐겁게 한다는 평가다.

공포가 단순하지만 이 건물은 11량이나 되어 지붕이 큰 편이어서 맞배지붕으로 처리했다. 맞배지붕과 11량의 아름다움은 옆에서 보면 잘 드러난다. 지붕의 무게가 기둥에 골고루 분산되어 전달되도록 짠 부재가 구조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장식적인 기능을 더해 보는 이를 즐겁게 한다는 평가다.

대웅전 부재들 사이에는 작은 벽화(壁畵)가 있었다. 공양한 꽃꽂이, 작은 부처와 나한(羅漢)들, 극락조, 악기를 타는 비천 등 많은 벽화들이 1937년 수리 때 발견되어 사람들을 찬탄(讚歎)하게 했었다. 그런데 떼어놨던 벽화가 한국전쟁 때에 부서져 버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모사(摹寫)한 그림 몇 편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어 불행 중 다행이다.

이응로 화백이 머물렀다는 수덕여관도 잘 보존되어 있다. 그는 한국전쟁 때도 이곳에 머무르며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고 한다. 대흥사 가는 길목에 유선관이 있는 것처럼 이곳에서 하룻밤을 머무르며 수덕사가 품고 있는 아름다운 밤 풍경도 제대로 느껴볼 수 있다면 좋겠다.

먼 거리를 마다않고 수덕사를 찾았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몇 해 전 어느 가을날, 수덕사 대웅전 부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던 누군가의 이야기가 떠올라서였다. 나도 그를 따라 대웅전 마루에 무릎을 꿇고 자비로운 부처님 모습을 그렇게 한참동안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수덕사 대웅전은 참 매력적이었다. 모두들 부처님을 향해 절을 올리고 있었지만 난 무언가에 홀린 듯 그렇게 한참을 머물렀다. 오래된 것들이 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고 진중한 느낌, 그 무엇이 분명 있다. 켜켜이 쌓인 세월의 무게 앞에 잠시 머물렀다 가는 티끌 같은 존재의 하찮음을 또 한 번 깨닫게 되는 나는 경건(敬虔)해진다. 부처님도 아무 말이 없었다. 어찌 보면 근엄한 듯, 또 어떻게 보면 한없이 자비(慈悲)로운 미소로 나를 내려다보고만 계셨다. 

해가 저무는 덕숭산에 부는 바람은 내 속의 열기를 식혀주려는 듯 차가웠다. 정신이 번쩍 드는 듯 했다. 답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닌데 왜 난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 이곳에 왔던 것일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육신은 여전히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있고, 부처님의 땅을 벗어나는 순간 다시 번뇌(煩惱)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음을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수덕사 사천왕문에 모셔진 사천왕상의 모습에서 위엄이 느껴진다. 단청을 칠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고 사천왕상의 채색(彩色)도 무척 화려하다. 머리 위 장식이 마치 단풍 든 것처럼 불타오르는 듯하다. 수덕사를 내려오는 길에 일주문(一柱門)을 다시 바라본다. 푸른 신록을 배경으로 두 마리의 용이 마치 돌기둥을 뚫고 나오는 것 같다. 뒤돌아서 속세의 사하촌(寺下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산허리에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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