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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그리다

보고 싶은 내 마음이 다녀간 줄 알아라 - 운주사

by 푸른가람 2023.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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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 정호승, <풍경 달다>

굳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천불천탑(千佛千塔)의 절’ 운주사를 다시 찾은 것도 가을이었다. 어느 때라도 나쁘지 않겠지만 구름이 머무는 절, 운주사는 가을이 제격일 것 같다. 이 절은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힘든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돌아서는 발걸음이 아쉽고, 매번 다음을 기약하게 만든다. 와불(臥佛)의 품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고, 애틋한 그리움은 풍경에 달아 둔다.

운주사를 처음 찾았던 것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던 어느 가을날 오후였다. 하늘은 청명하기 그지없었고, 운주사 위에 머물러 있는 하얀 구름이 절 이름과 참 잘 어울린다는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마음에 쏙 드는 절을 이제 서야 알게 되었을까 하는 아쉬움과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교차하기도 했었다.

운주사 일주문을 지나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이처럼 수많은 부처님과 탑들을 마주하게 된다. 천불천탑의 절에 온 것을 실감하게 된다. 미적 감각은 턱없이 떨어질지라도 나와 비슷한 누군가의 마음이 느껴져 위로를 받는다.

절이 크고 웅장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주변 풍광이 수려해 사람의 마음을 쏙 빼놓을 정도라서 그랬던 것도 물론 아니다. 운주사는 지금까지 다녀본 사찰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미스테리한 암호(暗號)와 예언(豫言), 지나치게 친숙한 이웃의 얼굴, 너무나 상반된 이미지가 공존하면서 새로운 화두를 잉태(孕胎)하고 있다.

운주사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이 작은 절이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의 무대로 등장하면서부터다. 소설 속 운주사는 천민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천불천탑을 세우려 했던 혁명의 성지(聖地)였다. 이후 시와 드라마의 소재로 소개되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명소가 되었지만 절의 창건과 천불천탑의 유래는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다.

절 입구에서 일주문을 지나 조금 더 걸어 들어가면 높다랗게 솟아있는 수많은 석탑이 나타난다. 석가탑이나 다보탑까지는 아니더라도 보통의 사찰 경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제된 조형미의 석탑 모양이 결코 아니다. 누군가가 건성건성 쌓아올린 듯 보이기까지 할 정도다. 

석탑이 다가 아니다. 바로 곁에는 암각화(巖刻畵)로 그려지거나 바위에 조각된 수많은 석불들이 세워져 있는데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많다. 석탑과 마찬가지로 이 석불들도 정제되지 않았다. 전문으로 돌을 다루던 석공(石工)이 아닌 일반인의 솜씨임이 분명하다. 세련되진 못하되, 그 표정들이나 생김새가 아주 정겹다.

운주사 와불은 거대한 바위 위에 금슬 좋은 모습으로 누워있다. 도선 스님의 명으로 불상을 만들고 있던 석공이 날이 새 급히 하늘로 올라가느라 미처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2017년에 ‘화순 운주사 석불석탑군’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다.

‘천불천탑의 절’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닌가 보다. 과거에는 정말로 천 개의 석탑과 천 개의 불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화재로 소실되고 정유재란 때는 왜군의 침탈(侵奪)에 시달린 운주사는 이후 아예 폐사되고 말았다. 폐사지에 남겨진 부처와 탑들은 이런저런 사연으로 훼손되고 소실되었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1942년까지 이 절에는 213개의 석불과 30개의 석탑이 있었는데, 지금은 석불 70개와 12개의 석탑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천불신앙은 우리나라에서 오래부터 있어 왔다. 불가에서 ‘천(千)’은 무한히 많음을 뜻한다. 천불은 인간사의 번뇌(煩惱)로부터 중생을 구제해 주는 부처이니 천불을 만드는 것은 이처럼 간절한 바람이나 소망을 이루고자 하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해남 대흥사를 비롯해 여러 사찰에서 천불전을 모시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이한 것은 한 불전 안에 천불을 모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운주사의 구석구석에 부처와 탑의 모양으로 자리해 있다. 또한, 나무나 청동처럼 가공하기 쉬운 소재를 사용하여 작게 만든 것이 보통인데, 운주사처럼 돌을 가지고 거대한 탑과 불상을 조성한 경우는 흔치가 않다. 불상과 탑의 배치가 밤하늘의 별자리 배치가 일치한다는 천문학자의 주장도 있다고 하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운주사의 천불천탑은 누가 만들었을까. 황석영의 소설에서처럼 노비와 천민들이 그들만의 해방구를 몰래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하늘에서 석공이 내려와 뚝딱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가장 유명한 전설은 풍수지리의 비조(鼻祖)로 알려진 신라 말의 도선국사가 운주사를 창건했다는 것이다. 

풍수지리에 능했던 도선국사가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로 파악해 보니 산이 많은 동쪽의 영남지역은 무겁고 서쪽의 호남지역은 가벼워 배가 기울어질 것이 염려됐다고 한다. 그냥 두면 우리나라의 기운이 일본 쪽으로 몽땅 흘러간다는 것이다. 스님이 이를 막기 위해 배의 중심에 천 개의 석탑과 불상을 하룻밤 사이에 만들었는데 그 자리가 바로 운주계곡이라는 것이다. 도선국사는 8세기 인물로 운주사가 세워지기 한참 전이니 현실적이지 않은 전설일 뿐이지만 운주사 뒷산에 올라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운주사는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천불산에 있으며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다. 도선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전남대 박물관에서 여러 차례 조사를 했으나 정확한 창건연대와 창건주체 등을 밝혀내지 못했다고 한다.

천불천탑 가운데서도 중심이 되는 것은 누워 있는 부처님이다. 흔히 말하는 ‘운주사 와불(臥佛)’이다. 운주사에 왔다면 이 와불을 꼭 만나보고 가야 한다. 부부와불이라고도 불리는데 운주사의 천불천탑 가운데 가장 늦게 만들어진 부처님이라고 한다. 운주사의 칠성바위가 가리키는 정북 방향에 위치해 있는 북극성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운주사 와불은 엄밀히 얘기하자면 와불이 아니다. 원래 와불은 석가모니가 모로 누워 돌아가신 모습을 새긴 측와상(側臥像)을 얘기하는데 운주사 와불 두 기 중 위의 것은 입상, 아래 것은 좌상이다. 원래는 자연 암반에다 불상을 조각하고 세우려 했는데 손상 없이 떼어내기 어려워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과학적 조사 결과다. 

안타깝게도 돌부처를 힘들여 새겨놓고도 정작 일으켜 세우지는 못했다. 마지막 부처만 세우면 세상이 바뀌는데 고단함을 이기지 못한 한 석공이 거짓으로 닭이 울었다 외치는 바람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자신의 고달픈 삶을 부처에 투영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사람들은 희망을 잃었고, 부처도 꼿꼿이 서지 못하고 비탈에 처박힌 채 천년을 누워있게 된 것이다.

와불은 길이가 무려 12미터 너비가 10미터에 달하는 바위에 나란히 조각되어 있다. 이 와불이 일어서는 날 세상이 뒤바뀌고 천 년간 태평성대(太平聖代)가 이어질 것이라는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져 온다. 이것 또한 미륵신앙과 연관이 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 옛날 힘들었던 삶을 미래의 미륵불(彌勒佛)에 의지하며 지탱했던 민초들이 떠오른다. 한 줄기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현실의 고단함마저 견뎌 내고자 했던 옛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으로 이해해 보련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절집은 한없이 고요하다. 무수한 욕심과 번뇌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이내 깊이 가라앉을 듯하다. 스님의 목탁 소리와 이따금씩 울려 퍼지는 풍경 소리만이 산사의 적막을 일깨운다. "말씀은 가만가만, 걸음은 조용히"라는 푯말이 없더라도 누구나 절로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게 된다. 

정제된 조형미와는 한참 거리가 먼, 투박함과 애달픈 민초의 삶이 투영된 불상들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위로를 받고, 혹은 누군가를 위로하고 돌아갈 수 있을까.

예전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과 말소리가 절의 고요함을 깨워 주리라. 정제된 조형미와는 한참 거리가 먼, 투박함과 애달픈 민초의 삶이 투영(投影)되어 있는 불상과 불탑들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혹은 누군가를 위로하고 돌아갈 수 있을까. 절의 겉모습이 어떻게 달라진다한들, 따스하고 넉넉한 품만은 고이 간직했으면 좋겠다.

천불천탑의 절을 거니노라면 절로 시인의 마음을 닮게 된다. 압축되고 정제된 단어를 통해 시(詩)라는 형식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시인의 고통에 비할 수는 없지만, 운주사에는 내 안에 잠재(潛在)되어 있는 문학적 감성이 몽글몽글 피어나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시에 담긴 시인의 수많은 상징(象徵)과 은유(隱喩)를, 시인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여전히 내게 시란 것은 어렵다. 예전보다 시를 좀 더 자주 접하려 노력하고, 시를 읽으며 마음에 잔잔한 물결이 일어나는 놀라운 경험을 가끔 하기도 하지만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경우가 솔직히 더 많다. 이러이러한 시인의 시가 좋다고 하는데, 읽어봐도 왜 좋은지 모르겠으니 문학적 감성이라는 것이 벼락치기 공부하듯 한다고 해서 저절로 샘솟는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한 것 같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 정호승, <수선화에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시를 읽어보려 한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라며,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시고,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오고,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며 우리를 위로하는 시인에게서 잠시 숨 고를 여유를 얻는다.

산에 가도, 바다에 가도, 님하고 가면 좋다는 시인의 마음은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을 쏙 빼닮았다. 우리도 시인이 될 수 있고, 우리의 말이 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에 희망을 품어 보는 것이다. 좋은 시를 읽으면서 느끼는 감동은 천둥벼락처럼 내 가슴을 때리기보다는 하얀 천에 아름다운 빛깔이 스며들 듯 느리게 오지만, 쉬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진한 향기로 남아 때로는 가슴을 먹먹하게도 하고, 슬며시 웃음 짓게도 한다.

시에 문외한이었던 내게 시를 읽는 즐거움을 일깨워 준 이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시를 읽고 있자면 어느새 나는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쏟아지는 강변을 거닐기도 하고, 운주사 와불 옆에 팔 베고 누워 조용히 엄마를 부르기도 하고, 산사(山寺)의 적막(寂寞)을 깨는 풍경소리에 담긴 애끓는 그리움을 좇기도 한다. 그때가 바로 시가 내게로 온 바로 그 순간이다.

운주사를 돌아 나오는 길에 한참 동안 불상들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치 아는 이의 얼굴을 보는 듯하다. 따뜻하게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나 또한 위로받고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랜 세월 동안 깨지고, 갈라지고, 으스러진 불상과 불탑처럼 상처를 품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따스하고 넉넉한 품으로 안아주는 절로 남아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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