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의 보고(寶庫), 순천만을 다시 찾았다. 한여름 폭우처럼 세차게 쏟아지던 봄비도 그쳐 날씨는 그지없이 좋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때 이른 더위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식혀 주어 순천만을 완상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수백km를 달려 배고픔을 견디며 전망대를 올랐던, 무모했던 첫 순천여행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여정이었다. 눈 감으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떠오르는 순간들이다.
2008년 5월의 어느 봄날이었던가. 황홀한 순천만의 낙조(落照)에 마음을 빼앗겨 무작정 달려갔었다. 하지만 순천만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출발할 때만 해도 멀쩡하던 날씨가 순천만에 도착하자마자 돌변했다.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듯 하늘은 어두워지고, 바람은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불어댔다. 발길을 돌려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 여태껏 달려온 길이 아까워 그냥 직진하기로 했다. 갈대군락지를 관통해 뻗어있는 탐방로의 끝자락에 용산전망대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만 보였던 탓이다.
그러나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전망대로 오르는 길은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몇 번이고 도중에 되돌아갈까를 고민했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하는 것이라며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걷고 또 걷길 수십 여분. 마침내 전망대에 올라 바라본 순천만의 모습은 말 그대로 환상적이었다. 비록 아름다운 S라인을 뽐내는 낙조는 카메라에 담을 수 없었지만 망망대해로 이어지는 광활(廣闊)한 순천만의 장쾌(壯快)한 풍경을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전망대에 오른 노고를 잊기에 충분했었다.
덧없이 흐른 시간만큼 다시 찾은 순천만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예전보다 많이 채워지고 잘 정돈된 느낌이 든다고 할까. 굳이 거창하게 생태(生態), 환경(環境)의 중요성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누구나 이곳을 찾아 넓은 갈대군락지를 휘휘 돌아 용산전망대에서 순천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공부가 될 것 같다.
힘들었던 첫 순천만 여행의 기억 탓에 이번엔 전망대에 오르지 않기로 했다. 탐방로를 따라 드넓게 펼쳐져 있는 갈대군락지를 하염없이 거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갈대군락지 옆 수로를 따라 이따금씩 새들이 뜨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유람선은 한없이 느리게 순천만의 물살을 몸에 받으며 떠다니고 있었다. 바쁜 게걸음으로 분주한 작은 생명체의 모습마저도 여유롭게 느껴지는 순천만의 풍경들이었다.
느리게 걸으며 자세히 살피면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면 알게 되고,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진수(眞髓)를 꿰뚫게 된다. 수많은 생명들이 그들의 영역에서 펼치는 삶의 향연을 감상하려면, 순천만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가치를 제대로 보고 가려면 느려져야 한다. 발걸음도, 마음까지도.
그래서 순천만 여행은 한가로운 산책이 좋겠다. 바삐 움직이며 좀 더 많이 눈에 담아보려는 욕심도 거두자. 잠시 쉬어가도 좋다. 갈대밭을 돌아 나와 입구의 순천만 자연생태관에 이르는 길가에 원두막이 눈에 띈다. 관람객을 위한 편의시설인 듯하다. 원두막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니 어릴 적 시골 풍경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저 멀리 뙤약볕 아래 너른 논에서 연신 허리를 굽히며 피를 뽑는 농부의 모습이 아련하다. 아낙네는 새참을 머리에 이고 들로 나가나 보다. 손에는 시원한 막걸리가 담긴 주전자가 들려있다. 시냇가엔 족대로 고기 잡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으로 떠들썩하다. 갈증 난 녀석들은 모래로 걸러낸 강물에 목을 축이기도 한다. 너른 수박밭에 넝쿨마다 주렁주렁 달린 수박들은 빨갛게 속살이 익어가고 있을 테지.
깜빡 잠이 들었었나 보다. 청량(淸凉)한 햇살과 바람이 준 선물이다. 깨었으되, 마음은 여전히 꿈길을 헤맨다. 그리운 사람과 풍경을 꿈에서라도 보았으니 행복하다. 사람이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살았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 시간 속에서 또 얼마나 많은 것이 변모하였을까.
순천만이 지금처럼 부각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전세계적인 추세로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자연환경 훼손 탓이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거의 자취를 감춘 해안하구의 자연 생태계가 원형(原型)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 순천만이다. 덕분에 2003년 12월에 해양수산부에서 습지보존지역으로 지정되었고, 2006년 1월 20일에는 연안습지(沿岸濕地)로는 국내 최초로 람사르 협약에 등록된 것이다.
순천만은 천연기념물인 흑두루미의 세계적인 월동지로 유명하다. 조류(潮流)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우리나라 남․서해안에는 자연스레 갯벌이 발달하게 된다. 또한, 갈대가 촘촘하게 군락을 이루어 새들의 서식환경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은신처와 먹이를 제공해 준다. 그래서 해마다 수천여 마리의 흑두루미가 순천만에서 겨울을 나고 번식지인 시베리아로 돌아간다.
순천만이 각광(脚光)을 받게 된 데에는 정부와 지자체의 공(功)도 있지만 오랜 세월 이 땅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왔던 지역주민들의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흑두루미가 다치지 않게 일대의 전신주들을 모두 뽑아냈고, 무농약 농법으로 수확한 쌀을 논에 뿌려 먹이로 주고 있다. 순천만 갈대밭 구석구석에 산재되어 있던 식당들은 자리를 내주고 입구에 새로 단장한 지 오래다.
지난 2013년엔 순천만에서 큰 행사가 열렸다. ‘지구의 정원, 순천만’이라는 주제로 6개월 동안 열린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를 통해 순천만은 세계적인 생태관광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팽창하는 도심으로부터 순천만을 보호하기 위해 열렸던 친환경 박람회였는데, 덕분에 지금은 순천만을 보호하는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다.
박람회장이 정원으로 남아 순천 시민들에게는 휴식공간으로, 순천만을 찾은 여행자들에게는 생태관광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순천만습지와 지척에 순천만 국가정원이라는 새로운 볼거리로 재탄생했다. 입구에서 국제습지센터가 관람객을 맞는다. 순천만 국가정원의 주제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국제습지센터에서는 순천만의 생태를 만날 수 있다.
‘꿈의 다리’도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이다. 동천을 가운데 두고 둘로 나뉘어져 있는 공간을 연결하려고 설치한 꿈의 다리는 세계 최초로 물 위에 떠있는 미술관(美術館)이라 할 수 있다. 길이가 175미터에 이르는, 아시아에서는 가장 긴 지붕이 있는 인도교(人道橋)로 설치미술가 강익중이 만들었다. 순천만 국가정원을 처음 찾는 사람들이 가장 흥미롭게 살펴보는 곳 중 하나다.
다리의 외벽은 강익중의 글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오방색의 한글 유리타일 작품 1만여 점으로 구성했고, 내벽은 전 세계와 우리나라에서 모인 어린이 그림 14만여 점으로 꾸며졌다. 30여개의 빈 컨테이너들을 두 줄로 설치한 후 실내에 여러 개의 작은 창들을 내고 우리나라 전통 한옥의 구조처럼 대청을 통해 마당과 안채가 하나의 공간으로 만나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꿈의 다리를 건너면 순천만 국가정원의 핵심인 정원 영역에 들어선다. 우리나라의 전통 정원을 비롯해 아시아와 유럽 등 세계 12개 나라의 정원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밖에도 힐링정원, 실내정원, 해외작가정원, 길 위의 정원, 슬로우정원 등 다양한 볼거리가 빼곡하다. 모든 것을 보려 바삐 움직이기 보다는 한 곳이라도 제대로 살펴보는 게 좋겠다.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한 자리에 오래 머물며 꽃과 나무들이, 길 위로 불어가는 바람이 일러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고, 풍경과 함께 한 사람들과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눠보자.
작은 것을 내주고 큰 것을 얻고자 하는 혜안(慧眼)이 순천시민들에게는 있었나 보다. 지역주민들의 노력 덕분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자연 그대로의 순천만을 만끽하고 돌아갈 수 있는 것이고, 좋은 인상을 받고 돌아간 관람객들은 주위의 친구나 지인들에게 순천만을 또 소개하지 않겠는가. 대한민국 생태수도(生態首都)라는 말로 순천을 소개하는 것이 과한 자부심은 아닌 것 같다.
먼 거리를 달려 왔지만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볍다. 좋은 추억 하나를 담고 돌아갈 수 있으니 행복하다. 느린 걸음으로 걸으며, 순천만의 참다운 가치를 찾아보려는 노력을 했으니 또한 충분하다. 지금까지는 순천만의 낙조를 제일 먼저 떠올렸겠지만 앞으로는 아담한 원두막이 생각날 것 같다. 원두막에 올라 시원스런 바람을 맞으며 순천만을 즐기던 순간이 한없이 그리워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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