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사는 경북 의성군 단촌면 등운산에 위치한 조계종 제16교구의 본사이다. 이 절이 위치한 자리가 천하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연화반개형상(蓮花半開形狀)이라고 하는데, 연꽃이 반쯤 핀 모양이란 뜻이다. 풍수지리는 잘 모르지만 고운사를 찾았을 때 무언가 아늑하고 마음이 평안해지는 느낌을 받았으니 헛된 말은 아닌 것 같다.
화엄종의 창시자인 의상대사가 신라 신문왕 원년인 681년에 창건해 처음에는 고운사(高雲寺)로 불렸다. 이후 신라 말기 유(儒), 불(佛), 선(仙)에 통달해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이 이 절에 들어와 가운루와 우화루를 창건하고 머물게 되었는데 그의 호를 따 지금처럼 고운사(孤雲寺)로 불리게 되었다. 한자 이름으로는 높은 구름이 외로운 구름으로 바뀌게 된 것이지만 내겐 그저 고운 절로만 느껴진다.
최치원은 신라 최고의 지성(知性)이라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그의 나이 열두 살 때 당나라로 건너 가 6년 만에 과거에 합격했고, 875년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명성을 떨쳤다. 이후 신라로 돌아왔지만 6두품이라는 신분의 한계와 신라 말기의 총체적 혼란은 그에게 깊은 좌절을 안겼다. 최치원의 혁신적인 개혁안(改革案)들이 신라 사회에서 꽃을 피울 수 있었더라면 우리 역사도 많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든다.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이자 풍수지리사상의 시조 격인 도선국사가 이 절을 크게 일으켰다고 하는데 당시 5개의 법당과 10개의 요사채를 지닌 규모였다고 전해진다. 약사전의 부처님과 나한전 앞의 삼층석탑 역시 그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한창 번성했을 때는 366칸의 건물에 200여 대중이 수행하는 대사찰이었지만, 지금은 많이 쇠락(衰落)하여 교구 본사로는 비교적 작은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불교 31총본산의 하나였고, 지금은 의성, 안동, 봉화, 영양지역에 산재한 60여 곳의 크고 작은 사찰을 관장(管掌)하고 있다. 교구 본사로서 전국에서 유일하게 입장료를 받지 않는 사찰로도 유명하다. 아주 작은 사찰들이야 그렇다 쳐도 웬만한 사찰들은 문화재관람료라는 명목으로 돈을 받고 있는데, 이런 면에서도 고운사는 참 ‘고운 절’이 맞는 것 같다.
고운사로 들어가는 숲길 또한 아름답다. 잘 다듬어진 흙길은 참으로 곱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매끄러운 흙의 감촉을 오롯이 느끼며 걸어보고 싶은 유혹을 매번 느낀다. 몇 번을 왕복해도 질리지 않을 만큼 다양하고 풍성한 풍경을 선사한다. 특히 단풍이 화사하게 내려앉은 가을날의 숲 풍경은 말 그대로 그림이다. 그래서 이 길은 언제고 다시 찾아오고 싶은 곳이요 좋은 사람들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어느새 일주문에 다다랐다. 고운사의 느낌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포근하고 정겨운 느낌 그대로다. 이번엔 용기를 내 법당 안에 들어가 불전함에 시주도 하고, 간절한 소망을 담은 기도도 잠깐 올렸다. 여러 절을 다니는 동안 많이 무뎌지고 익숙해진 덕분이리라.
고운사에는 대웅보전, 극락전, 약사전, 나한전, 명부전, 고금당, 우화루 등 코고 작은 전각들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이 가운데 마음에 드는 건물을 꼽으라면 연수전과 가운루라 할 수 있다. 특히 연수전은 한참을 둘러보고도 내려가는 길에 다시 발길이 저절로 이끌릴 만큼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는 건물이다. 삐걱거리는 만세문을 열고 연수전을 들여다보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연수전은 조선시대 영조 임금이 내린 어첩(御牒)을 봉안하던 건물이었는데, 지금의 건물은 고종 때 지은 것이라 한다.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던 곳으로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건축 형태를 지닌 곳이다. 채색의 빛이 바랜 것을 보면 수백 년은 족히 넘어 보였는데, 고종 때 지은 건물이라고 하니 조금 의외다. 요즘 사찰들이 화려하게 채색하고 단장하는 모습과 비교된다. 구태여 손을 대기 보다는 오래된 대로 놔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가운루는 독특한 형태로 지어졌다. 신라시대 최치원이 건축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원래 이름은 가허루(駕虛樓)였다. 계곡 위에 돌기둥을 세우고, 이 돌기둥 위에 다시 나무기둥을 세워 건물을 올렸다. 계곡 아래에서 누각을 보면 마치 큰 바다를 항해(航海)하는 배처럼 보일 법 하다.
가운루 누각에 앉아 아래로는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를 듣고, 위로는 녹음이 우거진 푸른 산과 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는 풍경은 옛 기록에 전하는 것처럼 ‘신선의 세계’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겠다. 아쉽게도 지금은 계곡이 메워지고 물길마저 흐트러져 옛 풍광을 제대로 누리기 어려워졌다.
가운루에서 빼놓지 말고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서쪽 벽에 호랑이 그림이 그려져 있다. 당장이라도 덮쳐올 듯 그 위세가 사뭇 당당하다. 특히 눈빛이 사위(四圍)를 압도하듯 형형(熒熒)하다. 조선 중기에 그려졌다고 전해지는데 어디서 그림을 보더라도 호랑이 눈동자가 보는 이를 향한다는 것이다. 원래 그림은 요사채 공양간으로 옮겼고, 지금 가운루에 있는 그림은 모작(模作)이다. 호랑이 눈동자를 한참 응시하면 좋은 기운을 받을 수 있다니 고운사가 주는 고마운 선물로 여겨도 좋겠다.
가운루를 비켜 난 길을 따라 걸으면 본당인 대웅보전이 나온다. 등운산 산자락 아래 터를 잡고 있는 대웅보전에서는 조계종 본사의 위엄이 느껴진다. 그 기세 탓인지 대웅보전에는 여태껏 발을 들인 적이 없다. 크고 화려한 부처님 보다는 고불전이나 약사전에 모셔진 오래된 석불이 내 얘기에 좀 더 귀를 기울여주실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대웅보전을 지나 작은 언덕을 오르면 나한전과 스님들이 수행하는 선원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 지금의 나한전 자리에 대웅전이 위치해 있었는데 대웅전을 새로 지으면서 옮겨졌다 한다. 나한전 아래는 삼층석탑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곳에 서서 고운사를 내려 보다는 느낌을 참 좋아한다. 고운사에 올 때면 늘 여기에서 한참을 머무르곤 한다.
절을 내려오는 길에 극락전 옆 만덕당 마루에 잠시 앉아 땀을 식혔다. 극락전은 지금의 대웅보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고운사의 큰 법당 역할을 했다. 퇴락했으되, 단아한 기품은 잃지 않았다. 한두 번 보아온 풍경도 아닌데 맞은편 등운산을 바라보는 느낌이 이날따라 새삼스러웠다. 풍만한 젖가슴 같은 등운산과 그 위를 쉼 없이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니 우리네 인생이 저 구름처럼 덧없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잠시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남은 인생은 덧없는 구름이 아니라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는 산으로 살았으면 좋으련만.
욕심을 내려놓아야 할 절에 가서 우리는 무언가를 갈구한다. 그래서 절집을 사람들의 수많은 바람이 지었다고 했던가. 비운 뒤에라야 다시 채울 수 있는 것이 세상사의 당연한 법칙인데 어리석은 중생들은 손아귀에 쥐려고만 한다. 바라는 것도 많고 서운한 것도 많은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만 원짜리 기와 공양이라도 하고 와야 마음이 편한 까닭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묵지심융(默識心融)이라 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리라 여겨 본다. 내 마음이 전해지기는 했을까, 혹여 상대가 오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고민들도 이 절에서는 내려놓는다. 잠시 마주 한 찰나의 고요함을 통해 마음의 큰 위안을 얻고 절을 되돌아 나온다. 한 때는 오래된 절집이 주는 편안함과 세월의 무게, 풍요롭고도 상쾌한 숲길과 계곡의 시원스런 물소리에 이끌렸었는데, 이제는 조금 더 깊은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 다시 이곳을 오게 될 것 같다.
요즘 이름난 명산대찰 입구에는 등산객이나 관광객을 맞이하려 식당이나 상가들이 조성되어 있어 산사에 왔다는 기분을 느끼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 고운사는 상가는커녕, 주변의 민가로부터도 한참이나 떨어져 있어 천년고찰에 어울리는 고즈넉함을 맘껏 누릴 수가 있다. 그래서 높고 고운 절이다. 외롭긴 하지만, 또 고마운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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