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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그리다

깊은 산 속의 깊은 절 - 선암사

by 푸른가람 2023.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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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 속의 깊은 절’이란 표현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따 온 것이다. 그는 선암사를 소개하는 글을 마무리하면서 우리나라 산사의 미학적(美學的) 특질을 이렇게 표현했다. 사실 깊다는 표현은 산이나 절에 어울리지는 않다고 해야겠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고, 또한 이 말처럼 우리 땅이 지닌 풍광(風光)의 특징을 단적으로 잘 나타내는 어휘도 없다고 생각된다. 

선암사는 전남 순천시 승주읍의 조계산 동쪽에 위치해 있는 사찰이다. 신라 진흥왕 3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고찰로 전해지고 있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절이지만 사찰 운영을 놓고 조계종과 태고종 종단 사이에 해묵은 갈등을 빚어 볼썽사나운 모습이 세간에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불가에 들어서도 속세의 이해타산(利害打算)에서 쉬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인가 보다. 

선암사에 이르는 숲길은 참 아름답다. 말이나 글로 도저히 표현해낼 재간이 없다. 계곡을 끼고 돌아나가는 길을 걷고 있노라면 쉼 없이 흐르는 물소리와 상쾌한 숲 속의 공기만으로도 복잡한 마음들이 절로 씻기는 것 같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역시 깊은 산사에 어울리지 않게 지나치게 길이 넓다는 것이다.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나쁘다고 했던가.

이 다리를 건너면 마침내 불국토로 들어선다. 선암사 승선교는 금강산 장안사 입구의 비홍교와 더불어 가장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로 손꼽힌다. 선암사의 제1경이라 불린다.

처음 이 숲길은 무척 좁았을 것이다. 향기로운 도반(道伴)과 함께 걸을 수 있을 정도면 족했을 것이다. 그 이상의 욕심은 무의미했을 터이니 나머지는 자연의 몫이었겠지. 풀과 나무의 자리요 산짐승과 날짐승이 자유로이 제 삶을 영위(營爲)할 수 있는 공간으로 기꺼이 내어 주었으리라. 역설적이게도 숲길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발길, 호흡이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리라 짐작해 본다. 

아름다운 숲길의 끝자락에 그 유명한 승선교(昇仙橋)와 강선루(降仙樓)가 놓여 있다. 처음 선암사를 찾았던 이유 역시 바로 돌로 만든 이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다. 먼 길을 찾아온 노고가 전혀 아깝지 않을 만큼 훌륭한 풍광을 선사한다. 승선교 아래로 내려가 계곡에서 강선루를 바라보는 느낌은 언제나 매혹적(魅惑的)이다. 승선교를 통해 본 강선루의 모습은 선암사를 대표하는 풍경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히 선암사의 제1경이요, 백미(白眉)라 부를 만하다.

“냇물이 잔잔히 흐를 때는 무지개다리가 물속의 그림자와 합쳐 둥근 원을 그린다. 그럴 때 계곡 아래로 내려가 보면 그 동그라미 속에 강선루가 들어앉은 듯 보인다.”는 유홍준 교수의 설명 그대로다. 보물 제400호로 지정되어 있는 승선교를 한참 바라보고 있노라면 주변에 흔하게 널린 돌들을 가지고 어쩌면 이리도 단정한 다리를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원래는 진입로를 따라오다 아래쪽의 작은 돌다리를 건너 왼편으로 건너온 후 위쪽의 승선교를 지나 다시 계곡 오른편으로 건너오게, 디귿자 형태의 동선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오른편에 새로 넓은 진입로가 만들어지면서 지금은 이 승선교를 건너지 않고 바로 강선루를 지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나쁜 길은 넓을수록 나쁘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강선루가 지금의 자리에 놓인 연유를 들어보면 사뭇 흥미롭다. 조계산은 호남 제일의 풍수를 지녔다 일컬어지는데, 그 중에서도 선암사 자리가 중후(重厚)하고 안정된 곳으로 꼽힌다고 한다. 하지만 으뜸 명당 터에도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는데, 강선루를 사이로 해 좌우의 청룡백호(靑龍白虎)가 합을 이루지 못해 바람이 새어 나가고, 물살이 빠르게 흘러 나간다. 절터로 뻗어오는 양쪽 산줄기가 벌어져 좋은 기(氣)가 빠져 나가버린다는 것이다.

선암사 터가 지닌 풍수적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강선루가 세워졌다. 양쪽 산줄기가 벌어져 기(氣)가 빠지는 자리에 누각을 세워 막아준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이런 식으로 풍수상의 흠을 고쳐 보완했는데, 이를 비보풍수(裨補風水)라 일컫는다.

선암사 터가 지닌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강선루가 세워졌다. 양쪽 산줄기가 벌어져 기가 빠지는 자리에 누각을 세워 막아준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이런 식으로 풍수상의 흠을 고쳐 보완했는데 비보풍수(裨補風水)라 일컫는다. 지금껏 이곳을 지나며 산과 계곡, 무지개다리와 누각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에만 취했었는데 땅과 산줄기의 형세(形勢), 물길의 흐름에도 눈길을 두어야 제대로 된 감상(感想)이라 할 수 있겠다.

아름다운 무지개다리 승선교 아래에서 바라보는 강선루가 선암사의 제1경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그에 못지않은 멋진 풍경이 바로 조계문에 이르는 길이 아닐까 한다. 승선교와 강선루를 지나 선암사 조계문에 닿는 길은 구부러져 있다. 한 번에 절집을 드러내어 고스란히 보여주지 않고 굽은 길을 돌아 조금씩 내어준다.

일직선으로 길을 낸 보통의 절과 달리 원래의 높낮이와 경사를 거스르지 않고 자연에 순응(順應)한 형태를 보여준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절집 풍경은 가까워지고 이내 조바심이 난다. 그리운 이를 만나듯 설레는 순간이다. 가을인데도 온통 푸른빛을 지닌 울창한 숲을 걸어 조계문에 닿는 순간이 선암사에서 맛보게 되는 두 번째 행복이다. 

또 하나, 선암사의 명소라면 해우소(解憂所)를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 사찰 해우소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고 그 규모도 웬만한 법당보다 크다. 선암사에서는 지금도 해우소에서 만든 인분 퇴비로 스무 마지기의 논과 밭에서 농작물을 키워 먹고 있다고 하는데 화학비료로 키운 것보다 훨씬 맛이 좋다고 한다. 종국에는 자연으로 돌아가고 윤회(輪回)한다는 불가의 큰 가르침은 이렇듯 우리네 삶 가까이에 존재한다. 

절집의 해우소는 대부분 산비탈에 세워져 있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조선시대를 거치며 절은 산속 깊이 은둔(隱遁)하게 된다. 사대부들의 핍박과 천민보다 못한 신분 탓에 자연스레 속세와 떨어지게 되었고 산 속 계곡의 비탈과 둔덕을 일궈 절을 지었다. 엄청난 공력(功力)이 들었을 것이다. 그나마 평평한 부분은 법당과 요사채를 지었고, 비탈에는 해우소가 놓였다. 

비탈에 놓인 탓에 해우소는 앞에서 보면 1층, 뒤에서 보면 2층 누각 형태를 띠게 된다. 즉 해우소의 상단부는 절집의 끝과 연결되고 하단부는 절집에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논과 밭으로 연결되어 재미난 건축학적 공간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끝이면서도 시작인 공간, 이처럼 사찰의 건축에는 철학적 사유(思惟)가 스며들어 있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에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 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 정호승, <선암사>

정호승 시인은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 해우소에서 실컷 울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시적 감성이 모자란 나는 해우소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도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木魚)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고,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려주는 그 느낌을 오롯이 경험(經驗)해 보지는 못했다.

눈물 날만큼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눈에 보이는 겉모습만을 비교하면서 절망한다. 왜 유독 나만 이토록 힘든 것일까 분노하기도 한다. 하지만 각자의 어깨 위에 얹어진 고통의 크기는 달라 보이더라도 그 무게는 실상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리라. 

일주문 바로 위 범종각에는 장삼을 걸친 많은 스님이 도열해 있었다. 매일 되풀이되는 일상의 의식이었겠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무엇 하나 허투루 하지 않겠다는 구도자의 정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또한 그러한 고통이 있어 그 사람의 인생이 더욱 아름다울 수 있다고 어느 시인은 얘기했다. 그래서 신은 인간들에게 기쁨보다는 슬픔을, 즐거운 순간보다는 고통을 안겨준 것이라 한다. 그것은 어둠이 있어 별이 더욱 빛날 수 있는 것처럼, 겨울이 있어 봄이 더욱 기다려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이해해 보련다.

선암사의 가장 깊은 곳에는 무려 6백 년이 넘은 고매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매화나무로 선암매(仙巖梅)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봄이면 이 매화를 보러 많은 사람들이 선암사를 찾는다. 사람들은 꽃을 보고 싶은 마음에 쫓겨 아무 때나 떠나지만, 꽃은 아무 때나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시린 겨울을 이겨내고 고고하게 피어난 매화 향기가 선암사를 가득 채우는 날, 그날에는 봄비가 내려줬으면 좋겠다. 봄비에 옷이 젖어가듯 내 마음도 매화 향기에 촉촉이 젖어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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