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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野球·Baseball

양준혁, 그대가 진정한 대한민국 홈런왕

by 푸른가람 2009.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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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터졌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던 홈런이었을까. 장종훈의 통산 340홈런을 뛰어넘는 역사적 홈런이 2009년 5월 9일 대구구장의 저녁하늘을 갈랐다. 1993년 삼성 입단 이후 무려 17시즌 2,006번째 경기 8,367번째 타석에서 일궈낸 대기록이다. 타고난 천재성만으로 이룩한 대기록이 아니라 더욱 의미가 크다.  

정상의 자리에서도 늘 변화를 시도하고, 묵묵히 야구만을 생각하며 걸어온 양준혁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이루기 어려웠을 것이다. 쌍방울의 백지수표 제의마저 포기하고 고향팀과 친구 김태한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프로입단을 1년 미루고도 끝내 삼성 유니폼을 입었던 의리의 사나이 양준혁에 얽힌 일화는 이제 프로야구의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되었다.

입단 첫해 방위복무로 전반기에는 원정경기에 출장할 수 없는 핸디탭에도 불구하고 타율 .341에 23홈런 90타점을 기록하며 단박에 '괴물'이란 별명을 얻었던 양준혁은 이만수의 대를 이을 삼성의 '파란피' 그 자체였다. 신인같지 않은 신인에게 신인왕은 기본이었고 MVP까지 노릴만한 성적이었지만 그는 욕심내지 않고 팀 선배 김성래에게 양보(?)했다.

1998년까지 단 한번도 3할 밑으로 내려간 적이 없었고, 두자릿수 홈런은 기본이었다. 93년 입단 첫해 타격왕을 시작으로 1996년 3할4푼6리, 1998년 3할4푼2리로 타격왕 타이틀의 주인공이 되었고, 방망이를 거꾸로 쥐고도 3할을 친다는 얘기가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기록으로 증명했다. 1996년부터 1998년까지는 3년연속 골든글러브를 차지하기도 했다.

해마다 2,30개의 홈런을 쳤지만 이상하게도 홈런왕과는 인연이 없었다. 가까이에는 팀동료 이승엽이 있었고, 바다 건너에서 온 타이런 우즈라는 홈런타자에 가려 그는 홈런에 있어서는 언제나 2인자에 만족해야 했다. 그와 인연이 없었던 것이 홈런왕만은 아니었다. 만년 한국시리즈 준우승팀의 딱지는 양준혁이 팀의 중심으로 활약하는 동안에도 여전했다.

언제까지나 대구의 상징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킬 것으로 믿었던 양준혁에게도 시련의 시간이 있었다. 팔자에 없던 파란만장한 떠돌이 인생은 허약한 마운드 때문에 한국시리즈 정상 일보직전에서 눈물을 뿌려야만 했던 삼성의 암울했던 8,90년대의 야구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1998년 시즌을 마치고 임창용과 트레이드되며 낯선 광주로 떠나야만 하는 기구한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믿었던 고향팀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양준혁은 은퇴까지 불사하겠다며 트레이드 거부 움직임을 보였다. 당시 해태 김응룡감독의 설득끝에 결국 해태의 빨간 유니폼을 입게 되었지만 어색한 동거는 1년만에 끝을 맺는다.

1999년 시즌 빨간 상의와 검은 바지를 입고 대구를 찾은 양준혁에게 대구팬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고, 그는 타석에서 헬맷을 벗어 정중하게 답례하며 끈끈한 사랑을 확인했다. 해태에서는 불과 한시즌만을 보냈지만 광주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3할2푼3리의 타율과 32홈런 105타점에다 21개의 도루로 1996년(28홈런-23도루)과 1997년(30홈런-25도루)에 이어 생애 세번째 20-20까지 기록했고, 1999년의 105타점은 그의 커리어 하이 기록이기도 하다.

선수협의회 파동 끝에 2000년에 LG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게 된 양준혁은 장타 보다는 정교함에 초점을 맞춘 타격으로 2001년 .355의 고타율로 타격왕에 올랐다. 덕분에 홈런은 2년동안 29개('00년 15개, '01년 14개)로 급감했다. FA자격을 얻은 2002년 김응룡감독의 부름을 받고 대구로 유턴을 하게되었지만 사실 이 당시만 해도 양준혁이 다시 삼성으로 되돌아오리라는 것은 그저 팬들의 희망사항에 불과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2002년 그는 기적과도 같이 대구로 돌아왔다. 기적은 그해 가을에도 또한번 일어나 삼성이 21년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하게 된다. 그 드라마틱한 역사의 현장에 양준혁이 있었다. 극도의 부진속에서도 극적인 동점홈런을 터뜨렸던 이승엽을 얼싸안고 뜨거운 사나이 눈물을 나누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2002년 그는 아홉시즌 동안 한번도 놓치지 않았던 3할 타율 달성에 처음으로 실패하며 생애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시즌 초반의 부진을 그나마 후반에 회복한 것이 타율 .276에 14홈런 50타점이라는 성적표였다. '양준혁 3할 실패 = 삼성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불편한 공식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묘하게도 그 징크스는 양준혁이 2할6푼1리 13홈런 50타점으로 부진했던 2005년에 또한번 되풀이되기도 했다.

2002년과 2005년의 부진으로 이제 한물 간 게 아니냐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도 양준혁은 어김없이 부활했다. 2003년 .329의 고타율에 무려 홈런 33개, 92타점을 기록하더니 이듬해인 2004년에는 타율 .315에 28홈런 103타점으로 이승엽이 빠진 삼성 타선을 이끌었다.

양준혁의 2006년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다. 바로 전해인 2005년에 다시한번 3할 밑으로 떨어지며 위기를 맞는가 싶더니 어김없이 3할3리에 18홈런 81타점으로 부활했다. 게다가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은 한화를 꺾고 한국시리즈 2연패에도 성공했다. 양준혁이 3할을 치고도 삼성이 한국시리즈에 우승한 첫 사례인 것이다. 양준혁의 2007년은 더욱 드라마틱했다.  타율은 3할3푼7리로 껑충 뛰었고 홈런 22개와 72타점을 올렸다. 시즌 막바지에 20도루까지 성공시키며 생애 네번째 20-20을 달성하는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해 그의 나이는 서른아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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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을 고비로 확실히 양준혁의 성적은 하향세를 기록하고 있다. 2008년 타율 .278로 생애 세번째로 3할 달성에 실패했고, 처음으로 두자릿수 홈런 기록에도 실패했다. 확실히 스탯은 예년의 그것과 비교해 확연히 낮아졌다. 체력적 부담때문인지 부상도 잦다.

그러나 팬들은 변함없이 그를 믿고 응원한다. 과거에 그랬듯 3할 타율과 20홈런을 기본으로 쳐주지 못할지라도 고비때마다 팀의 중심에서 역할을 해주리라 기대한다. 양준혁은 통산홈런 신기록을 달성하면서도 자세를 한껏 낮췄다. 통산 340개의 홈런기록을 보유하고 있던 장종훈(1990년부터 1992년까지 3년연속 홈런왕 차지) 한화 코치에게 영광을 돌렸고, 김태균이나 이대호 같은 후배들이 곧 자신의 기록을 깨어줄 것을 기대한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단 한번도 프로리그에서 홈런왕을 차지한 적이 없는 무관의 제왕이었지만, 그 홈런왕들이 감히 꿈꾸지 못했던 대기록을 이룩했다. 그래서 나는 양준혁을 대한민국의 진정한 홈런왕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그가 앞으도 그라운드에서 현역으로 뛰며 활약하는 모습을 변함없이 지켜보게 되길 기원하며, 그가 야구가 아닌 인생에서도 큼지막한 만루홈런을 치게 될 그날도 하루빨리 오길 기다려본다. 양신 만세!!!

* 기록은 한국야구위원회, 스탯티즈의 자료를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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