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 KBO는 양대리그제를 도입했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몰라도 참 신선(?)했다. 말이 양대리그제지, 8개구단을 드림과 매직리그로 4개씩 나눠 줄세우기에 불과했다. 같은 리그간, 타 리그간 경기수에 차등을 두었다고는 하지만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이벤트식의 인터리그 개념도 아니었다.
실험적인 시도 끝에 플레이오프에 초대받은 4개팀이 결정됐다. 두산과 한화, 삼성과 롯데가 승부의 외나무다리에서 맞닥뜨렸다. ‘91년과 ’92년 2년연속 준플레이오프에서 만나 사이좋게 1승씩을 나눠가졌던 두 팀의 대결은 그야말로 ‘혈투’를 뛰어넘은 전쟁이었다.
포연이 자욱한 전쟁터처럼 폭죽이 터지고 삶은계란, 라면국물과 배트가 대구구장 상공을 날아다녔던 플레이오프 7차전을 기억하는가? 1986년 삼성과 해태의 한국시리즈 3차전 종료후 해태구단 버스가 성난 관중들에 의해 불탄 이후 그처럼 살벌한 싸움도 보기 드물었던 것 같다. ‘84년 한국시리즈처럼 절대적 우위가 점쳐지던 삼성이었다. 플레이오프 역시 3승1패로 삼성이 우세를 보이며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그러나 사직구장에서 벌어진 5차전. 마지막 승부를 결정짓기 위해 마운드에 올랐던 당대 최고 마무리 임창용은 그러나 특급용병 호세의 홈런포 한방에 무너졌다. 이승엽의 부축 속에 눈물을 흘리며 마운드를 내려오던 그의 모습이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사직구장을 가득메운 롯데팬들에겐 지상 최대의 환희를 선사했을 그 순간. 삼성팬들은 대구에서 벌어질 최종전을 벼르고 있었다. 이제 겨우 3승2패였다. 2경기 중에 한경기만 잡으면 될 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99년 플레이오프가 ’84년 한국시리즈 악몽의 재판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최종 7차전 승부도 15년 전의 그날처럼 드라마틱했다. 삼성은 노장진, 롯데는 문동환을 선발 투입했다. 초반은 역시 삼성의 페이스였다. 0의 행진은 3회말에 깨졌다. 이승엽과 김기태의 연속타자 홈런이 이어지며 경기는 2:0. 대구구장을 찾은 팬들이 흥에 겨워 술잔을 기울일 즈음 승부의 추를 되돌릴 홈런이 터져 나왔다. 6회초 사직의 영웅 호세는 대구구장 펜스를 넘기는 솔로홈런으로 추격의 불씨를 당겼다.
이때부터 야구장은 더 이상 야구장이 아니었다. 그곳은 총칼없는 전쟁터였다. 홈런을 치고 위풍당당하게 롯데 덕아웃으로 귀환하던 호세를 향해 관중석에서 계란과 맥주캔이 쏟아졌다. 느닷없는 계란세례에 급소를 맞은 호세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배트를 뺐어들고 관중석을 향해 내던졌다. 프로사상 최초로 선수와 관중들이 철망을 가운데 두고 싸움을 벌이는 해프닝이 일어난 것이다. 이에 격분한 롯데 선수들은 장비를 챙겨들고 구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심판들과 경기 감독관이 롯데선수단을 설득시킨 이후에야 이 아수라장은 겨우 진정됐다.
호세는 퇴장당했고 경기는 30여분간 중단된 후 속개됐다. 경기가 재개되자마자 마해영은 어깨가 식은 노장진의 공을 강타하여 기어이 동점홈런을 뽑아냈다. 분위기는 롯데 쪽으로 순식간에 기울었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마해영은 헬멧을 내동댕이치는 화끈한 세레머니로 삼성팬들에게 멋지게 복수했다.
이후 경기 내용은 간략하게 줄이고자 한다. 글을 쓰다보니 괜시리 울화가 치민다. 8회말 김종훈과 이승엽이 백투백홈런을 대구구 가을하늘로 쏘아 올릴때만 하더라도 나 역시 승리를 확신하며 친구와 함께 맥주를 들이켰다. 그러나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던 것일까? 롯데는 곧바로 임수혁의 동점홈런으로 응수했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길고긴 승부는 11회초 김민재의 결승타로 그렇게 끝이 났다. 11회말 주형광의 세타자 연속 삼진은 롯데팬들에겐 보너스였다.
‘99년 포스트시즌을 기점으로 삼성과 롯데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후로 호세의 배영수 구타사건 등 굵직굵직한 사건도 이어졌다. 정규시즌에서 롯데는 언제나 삼성의 ’밥‘이었다. 그러나 가을에 만나는 롯데는 완전히 다른 상대였다. “너흰 우리 상대가 아냐”라며 애써 무시하고 싶지만 결과는 늘 예상밖이었다. 그 지긋지긋한 가을잔치에서의 악연을 끊을 좋은 기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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