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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그리다

800년 넘은 느티나무의 속삭임 - 비암사

by 푸른가람 2023.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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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등성이를 따라 논밭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시골길을 따라 비암사로 간다. 오가는 사람도, 차도 드물어 한적하다. 도깨비라도 튀어나올까 싶은 길에서 우연찮게 도깨비도로를 만난다. 제주도에도, 안동에서 봉화 넘어가는 35번 국도에도 도깨비도로가 있다. 

내리막길인데 오르막처럼 보인다. 착시(錯視) 때문이다. 착시의 원인을 두고도 설명이 엇갈린다. 의사들은 ‘뇌의 착각’이라 하고, 지형학자들은 지형지물 때문에 착시가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과학적인 이유 따위야 접어두고서라도 잠깐 재미나고 신비한 경험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

비암사를 지척에 두고 작고 예쁜 공원이 하나 있다. 다비숲공원이라 불리는데 한가로이 거닐기에 안성맞춤이다. 갖가지 나무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뽐낸다. 그칠 듯 이어지는 물소리를 따라가면 자그마한 시내가 나온다. 세종시를 굽이쳐 흘러가는 조천의 발원지가 여기다. 조천(鳥川)은 갈대와 억새풀이 무성하고 새들이 많이 모인다 해서 ‘새내’라고 부른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극락보전은 불교도의 이상향인 서방 극락정토를 묘사하고 그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이다. 비암사 극락보전은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덤벙 초석을 놓고 배흘림이 뚜렷한 둥근 기둥을 사용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조선 후기의 화려한 다포계 건물이다.

자연의 모습을 닮은 비암사는 고요하고 수수하다. 절은 낮은 산자락 아래 포근하게 자리를 잡았다. 비암사 입구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주인처럼 서서 넓은 품으로 손님을 맞는다. 둘레가 7.5미터에다 높이가 15미터에 이른다. 천년 가까이 살아 수령이 약 810년에 이른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켜켜이 쌓인 세월만큼 묵직하면서도 자애롭다. 

비암사에 올 때면 느티나무 앞에 우두커니 서서 한참을 머물곤 한다. 오랜 세월동안 모진 비바람을 견뎌왔을 이 나무가 바로 부처의 현신(現身)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바람이 지은 집 절』이란 책에서 지은이가 얘기했듯 비암사 느티나무야 말로 일주문이고, 천왕상이고, 살아있는 절의 역사인 것이다.

비암사는 규모가 크지도 않고,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사찰도 아니다.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로 확실한 창건연대도 알 수 없다. 입구에 들어서면 절이 한 눈에 다 들어올 정도다. 극락보전, 대웅전, 명부전, 산신각 등 당우(堂宇)들이 단촐하지만 사이좋게 어깨동무 하듯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이 정겹다. 

구석구석 어디를 다녀 봐도 깔끔하게 잘 정돈된 모습에서 보살님들의 부지런함을 짐작할 수 있다. 속세의 번잡(煩雜)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깊은 산사에서 맛볼 수 있는 고요함에다 고즈넉한 풍경(風景)까지 더해지니 한 폭의 수묵화(水墨畵)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넓은 마당의 여백은 삼층석탑이 채워준다. 1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1960년에 탑의 꼭대기에서 국보 106호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 보물 367호 기축명아미타불비상, 보물 368호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이 발견되어 국립청주박물관에 소장중이다. 고려시대 석탑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의 석탑은 1983년에 복원한 것이다. 

절집의 당우라고 해봐야 몇 되지 않는다. 삼층석탑 뒤편으로 극락보전과 대웅전이 놓여 있고, 대웅전 뒤편으로 돌계단을 따라 산길을 조금 오르면 산신각이 나온다. 여기에 서면 비암사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전각들이 화려하진 않으나 단아(端雅)하고 기품이 넘친다. 

절 입구에서 “아니 오신 듯 다녀가소서”라는 글귀와 오래된 느티나무가 반겨준다. 반겨주는 이 없어도 서러워하지 말 것이요, 다녀간 흔적 하나 남기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절에 들를 때마다 기와 불사를 하곤 한다. 기와불사는 집 없는 이에게 공덕(功德)을 쌓는 것이라 하는데 기와에 작은 소원 하나 적어 본다. 입구를 되돌아 나온다. 벽에 새겨진 문구가 마음을 친다. 아니 오신 듯 다녀가소서. 이 작은 가르침 하나도 따르지 못하는 부질없는 욕심에 부끄러워진다. 반겨주는 이 없어도 서러워하지 말 것이요 다녀간 흔적 하나 남기지 마라는 가르침 아니겠는가. 들어오는 길처럼 절 또한 한적하다. 홀로 절을 다 가진 듯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어서 좋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는 느티나무에서 무언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하다.

따뜻하고 정겨운 느낌이 드는 절이라서 참 좋다. 비암사를 처음 찾았던 그날의 날씨를 닮았다. 계절은 2월 중순이었지만 마치 한 달을 훌쩍 뛰어넘은 듯 봄날 마냥 따뜻하기만 했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울려 퍼지는 풍경(風磬) 소리를 들으며 한가로이 경내를 걸어 다니던 여유로움과 평안함을 잊을 수가 없다. 다시 비암사를 찾을 그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자연에서 신성(神性)을 보고 경이(驚異)를 느낄 때, 그 마음자리가 극락(極樂)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나 역시 동의한다. 우리가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 역시 부처의 세상일 테니까. 누군가가 비암사 느티나무에서 아미타부처의 현신(現身)을 보았다면 나는 언젠가 비암사를 함께 걷고 있을 행복한 나의 모습을 보았다. 그날 그 시간이 바로 나의 극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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