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웅장한 사찰에 들어서면 위압감을 느끼는 게 보통이지만 화엄사는 빛바랜 단청 그대로, 이끼 낀 돌탑 그대로의 모습에서 천년고찰다운 세월의 무게와 더불어 정겨움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가 화엄사를 “고요와 청순(淸純)의 아름다움이 지리산 깊은 산 속에 맥맥히 넘쳐흐르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고 하는데, 정말 그 느낌 그대로다.
노고단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어 화엄사 입구는 늘 자동차와 사람의 물결이다. 사하촌(寺下村)은 활기가 넘친다. 그러던 것이 계곡을 따라 오르다보면 속세의 소리는 이내 산사의 고요에 묻힌다. 성속의 경계가 이토록 뚜렷하다. 화엄사에 들어서자마자 보통의 절과는 다른 독특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가람 배치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화엄사는 건물들이 조금씩 어긋나 있는 것이다. 그 독특한 구조로 인해 절의 깊숙한 중심으로 몰입되며 걸음을 옮기게 된다.
서로 비껴 서 있는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 대웅전에 당도하려면 보제루라는 누각을 거쳐야 한다. 보통의 절들은 이 누각 아래를 통과해서 대웅전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곳은 누각 1층의 기둥 높이를 낮게 만들어 놓은 탓에 통과할 수는 없고 옆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또한 화엄사가 다른 절집들과 구별되는 점이라 할 수 있겠다.
보제루를 돌아 나와 넓은 마당에 서면 정면으로는 화엄사의 본당인 대웅전을, 왼쪽 계단 위로는 각황전을 마주하게 된다. 두 불전 모두 높은 석축 위에 자리해 있는 데다 각황전은 밖에서 볼 때는 2층 형태의 건물이라 그 모습이 사뭇 당당하다. 그 주변으로 명부전, 영산전, 원통전, 나한전, 적조당 등의 전각이 에워싸고 있고, 석탑과 석등들이 여백을 채워준다.
화엄사의 본당 대웅전은 비운(悲運)의 건물이다. 외모도 출중하고 풍체도 적당한 편인데, 각황전에 비해 왜소하게 보이는 탓에 관심이 덜하다. 이 같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각황전보다 큰 규모의 계단을 만들고, 석축 가까이에 건물을 놓이게 만들어 앞마당에서 바라봤을 때 좀 더 커 보이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지만 화엄사 하면 각황전을 제일로 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에는 부족했던 가 보다.
국보 제67호로 지정되어 있는 각황전은 바깥에서 볼 때는 2층 형태지만 안에서 보면 단층 구조이다. 우리나라 목조건축물 가운데 규모로는 첫 손가락에 꼽힌다. 우선 그 규모에 놀라고, 빛바랜 채로 천년의 세월을 간직하고 있는 단청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수많은 사찰들이 정비(整備), 복원(復原)의 이름으로 새 단장을 하는 모습을 많이 봤었는데 이곳은 그 모습 그대로라서 좋았다.
각황전 앞에는 그 위용에 어울릴만한 6미터가 넘는 거대한 석등이 서 있는데, 국보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석등은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에서도 제일 크다. 그 옛날 이 석등에 불이 켜져 있던 모습은 어땠을까 상상을 해보게 된다. 은은하게 새어나온 불빛이 화엄사의 중심인 각황전을 환히 비춰주고 있었겠지. 화엄사의 밤 풍경이 새삼 궁금해진다.
각황전 옆으로 난 108개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화엄사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국보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 국보 제35호인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이 바로 그것이다.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가 어머니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해 세운 탑이라는 전설이 있다.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한다. 동서남북 방향으로 사면에 세워진 네 마리의 사자 머리 위에 삼층짜리 석탑을 올린 독특한 형태다.
이렇듯 국보 문화재의 노천 박물관과도 같은 화엄사가 소실될 뻔한 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 빨치산 토벌대장을 맡고 있던 차일혁 총경에게 구례 화엄사를 소각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신록이 우거지게 되면 사찰이 빨치산의 본거지가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명령을 받은 그가 얼마나 곤혹스러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고민 끝에 차 총경은 “절을 태우는 데는 반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도 부족하다”며 각황전 등 전각의 문짝만 떼어내 소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빨치산을 감시하는 데 충분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이 일로 차 총경은 감봉처분 등을 받았지만 천년고찰 화엄사를 지켜낸 공로를 기려 1998년 화엄사에서 공적비를 세운데 이어, 2008년에는 문화재청에서 그의 아들에게 감사장을 전달했다고 한다.
화엄사만의 일이 아니었다. 해인사를 전투기로 폭격하라는 명령도 내려졌었다. 폭탄을 다른 곳에 떨어뜨린 덕분에 천년고찰 해인사는 무사할 수 있었지만 호남 일대의 고찰 대원사, 보림사, 송광사는 모두 전쟁의 참화 속에 잿더미가 됐다. 오대산 월정사 역시 21동의 당우와 문화재가 모두 사라지고 팔각구층석탑만 덩그러니 남았던 아픈 역사가 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찔한 순간이 아닌가.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자칫 소중한 문화유산이 한 줌 재로 사라질 뻔 했으니 질곡(桎梏)의 우리 현대사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전시(戰時)에 상부의 추상같은 명령까지 어겨 가며 화엄사를 지켜낸 차일혁 총경의 용기가 참으로 가상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치열했던 이념 대결이 많이 누그러졌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계단에 한참을 앉아 화엄사를 마음에 담아 보았다. 이리도 웅장하면서도 아름답고 단아한 느낌이 드는 절이 또 있을까. 화엄사를 환히 밝혀주던 홍매화가 지고 없어도 아쉽지 않았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온전한 모습으로 제자리를 지켜주어 고맙다. 많은 시간이 흘러도 고요하고 청순한 화엄사만의 아름다움을 간직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화엄사에 온 김에 발품을 조금 더 팔아 구층암에 올라보는 것도 좋다. 대웅전 뒤편으로 난 작은 숲길을 오르면 구층암에 다다른다. 나무 향기에 취해, 새소리에 홀리듯 걸으면 금방이다. 이름을 봐서는 구층석탑이 있을 법 하지만 지금은 앞마당에 삼층석탑만이 외로이 서있다. 봉정사가 영산암이라는 보석을 숨겨두었듯, 구층암 또한 화엄사의 비보(秘寶)라 할 만하다.
흙으로 빚은 부처 천 분을 모시고 있는 천불보전도 볼만 하지만 구층암과 마주보고 있는 선방의 기둥이 예사롭지 않다. 배흘림기둥과 같은 조형미를 논한 바는 아니다. 투박하고 못났다. 사람이 손을 대지 않은 채로 원래 모과나무 그대로 기둥을 삼았다. 살아서는 향기로운 열매를 맺었을 모과나무는 이 자리에 서서 영원을 기약한다. 구층탑은 세월에 허물어졌을지 몰라도 지리산의 넓은 품을 층층이 쌓아 올린 불심은 이처럼 굳고 단단하리라.
선방에는 다향사류(茶香四流)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선방 가득 향기로운 기운이 스며있는 듯하다. 과거 스님들이 용맹정진(勇猛精進)하던 선방이 그윽한 차 향기로 충만한 다실(茶室)이 되었다. 구층암은 주변에 야생차 밭이 있는 덕분에 예로부터 스님들이 차를 덖어 마셨다고 한다. 운수좋은 날이라면 주지 스님을 뵙고 차 한 잔 얻어 마시는 호사를 누릴 수도 있겠다.
아니라면 또 어떤가. 주인인 양 여유롭게 거닐어보아도 좋을 터. 모과나무 기둥에 기대보기도 하고, 부서지고 허물어진 돌탑을 어루만져 보기도 하자. 잠시 번잡한 마음을 내려놓고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산사의 숲을 거닐며 탐욕과 번뇌를 비워내면 내면의 상처들이 맑은 생각과 향기로운 마음으로 말끔히 치유(治癒)될 것만 같다.
무릇 어떤 곳에 어울리는 때가 따로 있기는 하다. 백양사는 애기단풍이 곱게 물드는 10월 무렵이 좋을 것이고, 영랑생가나 백련사는 동백꽃이 두둑 떨어지는 4월이, 안면도의 꽃지 해변은 붉은 낙조가 타오르는 한여름이 좋을 거다. 특히나 내세울 만한 사진 한 장 남기고 싶은 사람들에겐 그 ‘때’를 잘 맞춰 가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화엄사 역시 홍매화가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는 계절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여행에 따로 때가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이 바로 그때다. 여행전문가들이 죽기 전에 꼭 봐야 한다며 추천하는 명소가 아니라도 괜찮다. 그곳이 어디든 지친 마음이 쉴 수 있고, 가라앉은 내가 다시 떠오를 수 있는, 잠깐 동안의 위안과 감동이 있는 곳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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