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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그리다

이른 가을날 아침이면 맑은 향기 가득 하다네 - 천은사

by 푸른가람 2023.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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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 닿았더라면 아마도 좀 더 일찍 천은사를 찾았을 것이다. 이제야 이리 좋은 곳을 알게 된 것이 아쉬울 정도다. 지리산의 넉넉한 품속에 안긴 듯 자리 잡고 있는 천은사는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있어야 할 것은 다 갖추고 있는 넉넉한 절이다. 지금껏 전해 내려오고 있는 구렁이 설화(說話)가 고찰의 오랜 역사를 더욱 돋보이게 해 준다.

천은사는 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로 전남 구례군 광의면 지리산 서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화엄사, 쌍계사와 더불어 지리산 3대 사찰로 손꼽힌다. 신라 흥덕왕 3년(828)에 인도의 덕운 스님이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다 이곳에 천은사를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천은사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원래 절 이름이 감로사였는데 조선 숙종 5년(1679)에 단유선사가 이 절을 중수할 무렵에 절의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이때 한 스님이 용기를 내 구렁이를 잡아 죽였는데 이후 절의 샘에 물이 솟지 않았다고 한다.

극락보전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교주이자 중생들의 극락왕생을 인도하는 아미타부처님과 그 협시보살들을 모신 법당이다. 사찰에 따라서 미타전, 아미타전, 무량수전, 수광전이라고도 한다. 해마다 여름이면 천은사 극락보전 앞 배롱나무꽃이 붉게 피어나 산사의 풍경을 더욱 화사하게 빛내준다.

이런 이유로 ‘샘이 숨은 절’이란 뜻의 천은사로 절 이름이 바뀌었는데 문제는 절의 이름을 바꾸고 크게 중창했지만 화재가 나는 등 불상사가 자주 발생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물의 기운을 관장하는 이무기를 잡아 죽인 탓이라고 수군거렸는데 조선시대 4대 명필 중 한 명으로 칭송받는 이광사가 이곳을 찾았다가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마치 물이 흘러 떨어지는 것 같은 필체로 지리산 천은사란 현판을 써주고 일주문에 걸면 다시는 화재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 했다. 

사람들이 그대로 따라 했더니 신기하게도 이후에는 절에 불상사가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광사가 특이한 필체로 쓴 현판이 일주문에 붙어 있다. 그래서 천은사를 찾는 사람들은 일주문 앞에서 한참을 머물곤 한다. 오랜 역사와 더불어 구렁이 설화가 전해 내려오는 천은사가 더욱 신비롭게 느껴지는 이유다.

조선시대 4대 명필 가운데 한 명으로 칭송받는 이광사가 이곳을 찾았다가 마치 물이 흘러 떨어지는 것 같은 필체로 지리산 천은사란 현판을 써주고 나서는 절에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구렁이 설화와 함께 전한다.

절은 단아하면서도 고풍스럽다. 크고 웅장하지는 않지만 깊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 드는 절이라서 좋다. 극락보전과 팔상전을 지나 관음전에 오른다. 관음전 뒤편에 한참을 앉아 서늘한 가을바람을 즐기던 그날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풀 냄새며, 시원한 숲 내음이 마음을 푸근하게 만들어 주었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좀 더 오래 이곳에 머물러 있을 걸 그랬다. 그 평온한 시간, 무심히 흘러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시간마저 멈춰버린 듯 했다. 세상에서 가장 요염한 다람쥐가 이따금씩 그 고요함을 깨워주었던, 조금 이른 가을날의 천은사를 잊을 수 없다. 

이후로도 천은사를 여러 번 찾았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발걸음이 옮겨진다. 홀로 걸으니 조금은 쓸쓸하다. 무심히 흐르는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으나 기억은 더욱 또렷해진다. 앞날의 꿈을 떠올리기 보단 옛 추억을 반추(反芻)하는 일이 잦아졌다. 가끔 이 길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일까 사뭇 궁금해지기도 한다.  

어젯밤 비에 꽃이 피더니 
오늘 아침 바람에 꽃이 지네
가련하다, 한 해의 봄날이여
오고감이 비바람에 달렸구나
花開昨夜雨 花落今朝風 可憐一春事 往來風雨中
 
선조 때의 문장가 송한필의 오언시에 담긴 정서는 다분히 보편적이다. 덧없이 흘러가는 봄날의 정취에 대한 아쉬움은 감정을 지닌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금세 지고 나는 꽃을 보면서 사람들은 부질없는 인생사에 빗대며 상실감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될 것 같다. 

수홍루는 일주문을 지나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 놓인 무지개다리인 피안교 위에 지은 누각이다. 피안(彼岸)이란 온갖 번뇌에 휩싸여 생사윤회하는 고해(苦海)의 세상 건너편에 있는 극락을 뜻하는 말이다.

가는 봄을 아쉬워하는 마음보단 바람에 피고 지는 꽃에 연연하지 말고, 비바람을 탓하지 않는 성숙함을 본받아야겠다. 고려시대 문인인 이규보의 시에서 그 깊은 뜻을 배워봄이 어떨까. 꽃은 피고 지는 것이 제 태어난 숙명이요, 우리는 그저 자연의 섭리(攝理) 속에 피고 지는 꽃을 심고 가꾸고 지켜보는 즐거움을 누리면 그만일 것이다. 어차피 좋은 것 두고 떠나는 게 인생이니까.

꽃 심으면 안 필까 걱정하고
꽃 피면 또 질까 걱정하네
피고 짐이 모두 시름겨우니
꽃 심는 즐거움 알지 못해라
種花愁未發 花發又愁落 開落摠愁人 未識種花樂

극락보전 앞에는 백일 동안 붉은 자태를 뽐내는 배롱나무꽃이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천은사에는 내가 좋아하는 향기가 있다. 그 맑고 은은한 향기가 내가 머물렀던 구석구석에 지금도 온전히 남아 있을 것임을 믿는다. 천은사에 가는 날, 나는 또 그 향기를 좇아 한참을 관음전(觀音殿) 뒤편에서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얼마 전에는 이 절에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던 드라마가 촬영됐다. 화려한 영상 속 눈에 익은 풍경들이 처음엔 얼마나 반가웠던지. 하염없이 서성였던 곳을 애기씨가 사뿐사뿐 거닐었을 테고, 무심히 지나는 바람 속에서 그리운 추억을 떠올렸던 곳에선 화승총(火繩銃)의 화약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더라. 행여 사람들의 발걸음에 맑은 향기 이내 사라지진 않을까 조바심이 드는 건 그저 기우(杞憂)일 뿐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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