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 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워진 정자 주변에는 연못을 파고, 작은 돌다리를 통해 건널 수 있게 해놓았다. 폭도 좁고 길이도 짧은 돌다리를 건너면 피안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매번 어리석은 생각을 하곤 한다.
봉화 닭실마을은 삼남(경상․전라․충청도)의 4대 명당으로 꼽혔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따르면 봉화 닭실마을, 경주 양동마을, 안동 내앞과 하회마을이 그곳이다. 강릉의 선교장도 천하의 명당자리라고 하는데 터가 좋은 곳에서는 매번 좋은 기운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닭실이란 이름은 풍수지리학상 ‘금빛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충재 권벌이 터를 잡고 그의 후손들이 500년 이상이나 지켜오고 있는 것을 보면 명당임이 분명해 보인다.
충재 선생이 터를 잡은 후 이 마을에서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마을의 맥을 끊기 위한 치졸한 일도 벌어졌었다. 인근의 춘양목을 실어 나르기 위한 것이라는 명목을 내세우긴 했지만 곧은 길을 놔두고 이 마을 부근에 철도를 놓았던 건 닭의 천적인 지네 모양의 철길을 놓으면 이 마을의 정기가 끊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 한다.
닭실마을을 대표하는 건물이 충재고택과 청암정이다. 충재고택은 넓은 마당에 깔린 파란 잔디가 인상적이었다. 예전에야 아흔 아홉칸짜리 대저택이었겠지만 과거의 영화를 미루어 짐작만 할 뿐이다. 나지막한 담장과 그 안에 널찍하게 자리하고 있는 마당이 시원스럽다.
특히나 고택 마당에서 특이한 형태의 대문을 통해 부드러운 곡선의 산과 푸른 들녘을 바라보는 느낌이 아주 좋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이곳에 머물러 살고싶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래전 강릉 선교장을 거닐면서 부질없는 욕심이 났던 것처럼 말이다.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이면 훌륭한 관광자원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이미 이곳은 드라마나 영화의 배경으로 유명해졌다. 문근영, 박신양이 주연했던 <바람의 화원>에도 등장했고, 한석규, 이범수가 나왔던 <음란서생>의 촬영지였을 만큼 풍광이 뛰어나다. 청암정은 거북 모양의 바위 위에 아담한 정자가 세워져 있고, 연못이 둘러싸고 있다. 연못을 건너 청암정에 이르는 작은 돌다리가 무척 운치 있다.
청암정에 얽힌 전설도 재미있다. 1526년 충재 선생이 청암정을 세우고는 처음에 정자에 온돌을 넣었다고 한다. 방에 불을 넣자 바위가 우는 소리를 내 기이하게 여겼는데, 이곳을 지나가던 고승이 "거북 등에 불을 떼면 되겠느냐"고 해서 온돌을 마루방으로 바꾸고 바위 주변에 연못을 만들어 거북에게 물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문득 가을빛이 감도는 청암정의 모습이 궁금해진다. 청암정 주변에 심어놓은 단풍나무의 잎들이 울긋불긋 제빛을 토해내는 순간이면 더욱 황홀한 경치를 선사해 줄 것 같다. 이왕이면 해질녘이 더욱 좋겠다. 선명한 가을 햇살 속에 색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고 이내 서늘한 바람이 가을밤을 이끌고 불어오겠지.
수녀님 몇 분이 청암정 구경을 오셨나 보다. 바람에 살며시 흔들리는 옷자락이 고운 자태를 빼닮았다. 이곳에 서면 수백 년 전으로 되돌아가곤 한다. 팔자 좋은 한량들이 그랬던 것처럼 청암정에 올라 술 한 잔에 시 한 수 읊으며 소일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닭실마을 넓은 들판을 지나 작은 개울을 따라 난 숲길을 한참 걸어가다 보면 석천정사가 나온다. 석천정사는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의 석천계곡에 자리잡고 있는데 조선 중기 문신 권동보가 부친이었던 충재 권벌의 유지를 받들어 1535년(중종 30)에 세웠다. 청암정과 함께 이 일대가 1963년 사적 및 명승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수정 같은 계곡 사이로 비치는 정자의 모습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운치가 넘친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곡의 물소리는 시원하고 상쾌하다.
석천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과 정면 2칸 반 측면 1칸짜리 건물이 서로 이어진 평면 구조인데 전체가 34칸에 이른다. 지붕은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의 두 부분으로 달리 구성되어 있다. 석천정이 있는 석천계곡은 한여름에도 서늘한 기운이 느껴질 만큼 숲이 울창하고 풍광이 수려하다.
물길을 따라 짙은 숲의 터널을 지나 툭 터지듯 나타나는 계곡의 아름다움은 숨겨진 신선의 세상을 찾아가는 느낌이다. 넓은 바위에 앉아 쉼 없이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있자니 세상의 모든 시름과 잡념이 이내 사라지는 듯하다. 이 멋진 풍경을 함께 즐겼으면 좋겠다.
“내성천 물길을 따라 좁은 농로를 따라가다 짙은 숲의 터널을 지나 툭 터지듯 나타나는 계곡의 아름다움은 숨겨진 신선의 세상을 찾아가는 느낌”을 좇아 올가을 석천정사를 다시 찾아야겠다. 청암정이 있는 닭실마을과 석천정사, 산수유 마을을 잇는 ‘봉화 솔숲길’이 조성중이라고 하니 여유롭게 날을 잡아 정취를 맘껏 즐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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