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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그리다

깨달음과 치유의 천년 숲길 - 오대산 선재길

by 푸른가람 2023.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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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계절, 가을 느낌을 제대로 맛보기 위해 떠난 곳이 오대산이었다. 가을이면 웬만한 산들은 단풍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기 마련이다. 단풍하면 딱 떠오르는 곳이 내장산이나 설악산, 주왕산 정도였는데 오대산 단풍이 이토록 화려하고 예쁜 줄 미처 알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오대산 선재길의 아름다움은 단연 으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그림이다. 파란 하늘에 두둥실 뭉게구름은 떠다니고 맑디맑은 계곡물은 마음속까지 시원스레 자연의 소리를 들려준다. 점점 색을 더해가는 계곡 옆의 단풍 길은 보는 이의 마음에 큰 감동을 안겨 준다. 길을 걷는 이들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오게 할만큼 매력적이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이란 말이 바로 이런 풍경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월정사에서 차량 두 대가 겨우 비껴갈 정도인 비포장도로를 따라 상원사 방향으로 가다 보면 그 옛날 오대천 계곡을 따라 월정사와 상원사를 오갔던 길을 복원한 오대산 선재길이 나타난다. 1960년대 말 도로가 생기기 전에 스님과 신도들이 이용했던 이 길은 오대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의 모든 직원이 동원돼 3개월에 걸쳐 복원했다고 한다. 

오대산의 여러 봉우리에서 모여든 계류(溪流)가 상원사를 거쳐 월정사에 이르면 비로소 하천의 모습을 갖춘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이 계곡을 따라 걷다보면 수달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사진=강기석]

우리나라 전나무숲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월정사 전나무숲길에서부터 시작해 상원사까지 총 8.5km 길이로 왕복하는데 2시간 30분 정도가 걸린다. 선재라는 동자가 이 길을 걸으며 깨달음을 얻었다 해서 선재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길이 처음 복원되었을 때는 오대산 옛길로 부르기도 했었다. 계곡을 따라 평탄한 오솔길이 이어져 남녀노소 누구나 걷기에 부담이 없다. 

차량과 사람이 뒤엉켜 다니는 탐방로와 달리 이 오대산 선재길은 대부분이 푹신푹신한 흙길로 조성되어 있고, 군데군데 안내해설판과 수목 표찰이 설치되어 있어 탐방객이 오대산의 역사문화와 자연생태에 대해 공부할 수 있게 배려하고 있다. 또한 두 곳의 쉼터가 만들어져 있어 상쾌한 공기 속에서 산림욕을 즐길 수도 있다고 한다. 섶다리와 돌다리도 이 길의 명물이다. 길은 계곡을 따라 다리를 매개로 이어진다. 

큼지막한 돌을 물길 군데군데 놓아 만든 징검다리, 큰 나무둥치에 판자들을 이어 만든 나무다리, 그리고 이제는 쉽게 볼 수 없는 섶다리까지, 다양한 원시 형태의 다리가 있다. 지치면 잠시 다리에 앉아 쉬어가도 좋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곡의 물소리, 이름 모를 산새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번잡한 세상의 걱정거리를 금세 잊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다. 길이 아닌 차를 타고 상원사까지 이동하는 사람들은 이런 멋진 호사(豪奢)를 결코 누릴 수 없다.

특히나 2010년에 복원된 섶다리는 젊은이들에겐 신기한 볼거리가 될 성 싶다. 섶다리는 잘 썩지 않는 물푸레나무나 버드나무로 기둥을 세운다. 소나무나 참나무로 다리 상판을 만들고 섶을 엮어 깐 다음 그 위에 흙을 덮어 만든다. 섶다리는 주로 하폭(河幅)이 넓지 않고, 수심이 깊지 않은 개울이나 작은 강에 만들어졌는데 여름에 큰물이 지면 쉽게 떠내려가 ‘이별 다리’라고 불리기도 했다. 어릴 적 시골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이마저도 지금은 특별한 추억거리가 되었다. 

오대산 선재길은 사시사철 그 나름의 빛깔로 찾는 이들을 반겨줄 것이다. 봄이면 파릇파릇 생명이 움트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고, 여름이면 온통 우거진 녹음이 시원스러움을 전해주겠지.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이는 겨울은 또 어떨까.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따라 걷는 느낌은 그 무엇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즐거움일 것 같다.

한여름에도 전나무숲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어 전혀 더위를 느낄 수 없다. 전나무숲길 바로 옆에 있는 오대천 상류 개울의 시원한 물소리도 한껏 정취를 더해준다. 오대산 선재길은 사실상 전나무숲길이 시작이다. 높이가 수십 미터에 달하고 평균 수령 80년 이상의 전나무 1,700여 그루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사진=강기석]

그래서 그곳에 들어서면 번잡한 속세의 일상을 금세 잊어버릴 수 있고, 수많은 욕심과 집착에 사로잡혀 있던 나를 버리고 참다운 나를 만날 수가 있다. 숲을 느린 걸음으로 걷다 보면 부질없는 마음의 먼지들이 다 씻겨 나가 내 마음이 어느새 텅텅 비어있는 듯한 청량감(淸凉感)을 맛볼 수가 있는 것이다. 

오대산 선재길은 사실상 월정사 전나무숲이 그 시작이다. 월정사 전나무숲은 일주문에서 금강교에 이르는 1km 길 양쪽에 걸쳐 조성이 되어 있는데, 높이가 수십 미터에 달하고 평균수령 80년 이상의 전나무 1,700여 그루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한여름에도 전나무숲이 짙은 그늘을 만들어 주어 전혀 더위를 느낄 수 없다. 전나무 숲길 옆에 있는 오대천 상류 개울의 시원한 물소리도 한껏 정취를 더해 준다.

숲길 안쪽에는 지난 2006년 태풍 때 쓰러졌다는 전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그 밑동은 어른 2명이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거대한 면모를 자랑한다. 수령이 무려 500년이 넘는 나무였다고 하니 그날의 모진 비바람을 견뎌냈더라면 지금도 위풍당당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생각이 든다.

월정사 전나무숲이 만들어진 연유에 대한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원래는 이곳도 소나무숲이 울창했었다고 한다. 고려 말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선사(懶翁禪師)가 부처에게 공양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소나무에 쌓여있던 눈이 그릇으로 떨어졌다. 그때 어디선가 산신령이 나타나 공양을 망친 소나무를 꾸짖고, 대신 전나무 아홉 그루에게 절을 지키게 해 이후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나무숲이 월정사를 지키게 됐다는 것이다. 얘기를 듣고 나니 월정사 전나무숲이 더욱 신비스럽게 느껴진다.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마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 내가 풍경의 일부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그날의 시간 속에서 나는 그저 고요하고 평온했다. 내 마음에도 푸르고 풍성한 숲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 숲 속에서 마음을 씻고, 마음을 열어 ‘나’를 내려놓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금강교에서 일주문을 금세 돌아 나왔다. 몇 번이고 걸어보고 싶은 욕심이 났지만 더 늦기 전에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절 앞을 흐르는 개울의 물살이 힘차다. 쉼 없이 흐르는 물소리가 속세의 어지러운 소리들을 차단해 주는 듯하다. 마치 오대천을 경계로 속세와 피안이 나누어진 듯하다. 자연은 스스로 오염을 일으키지 않는 법. 차고 맑은 물속에만 산다는 열목어(熱目魚)가 이 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그림이 절로 그려진다. 

예로부터 오대산은 문수보살이 머무르는 성스러운 땅이라 했다. 1km 남짓한 전나무숲을 지나면 월정사가 부처님 품처럼 넉넉하게 중생들을 안아준다. 조계종 4교구 본사인 월정사는 한국전쟁 때 모든 당우가 불타버려 예전의 고풍스럽던 느낌을 많이 잃었다.[사진=강기석]

월정사부터 오대산 선재길이 시작되었다면 그 끝은 상원사에서 그친다. 상원사는 오대산의 깊은 산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지위는 많은 암자들과 함께 월정사의 말사에 불과하지만, 규모도 꽤 클뿐더러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사찰이다. 창건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자장율사가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사찰이지만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은 절이 있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 부르는데 법당 앞에 사리탑을 두고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다. 양산 통도사와 설악산 봉정암, 영월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그리고 이곳 오대산 상원사의 적멸보궁을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이라 부른다. 오대산 적멸보궁은 그 중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상원사는 조선의 일곱 번째 임금인 세조와 인연이 깊다. 조카의 왕위를 찬탈(簒奪)한 업보를 지우지 못한 세조는 평소 몸에 난 종기로 무척 고생했다고 전해진다. 상원사에 머물던 어느 날 오대천의 맑은 물에서 목욕을 하던 중 지나던 동자승에게 등을 밀어 달라 부탁하며 “어디 가서 임금의 등을 밀었다고 하지 말라.”고 당부했더니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직접 보았다고 하지 마라.”며 동자승이 사라졌다고 한다. 깜짝 놀란 세조가 화공을 시켜 동자승의 모습을 그리게 했는데 그 모습을 조각한 것이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이다.

이뿐 만이 아니다. 1년 뒤 세조가 다시 상원사를 찾았을 때, 고양이 한마리가 나타나 세조의 옷자락을 물고 늘어져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한다. 괴이한 행동에 전각을 뒤져 숨어있던 자객을 찾아낸 덕분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세조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고양이를 잘 기르라고 묘전(猫田)을 내렸다고 하는데, 문수전 아래 마당에 지금도 고양이 석상이 놓여있다.  

몇 해 전에 상원사 가는 길에 다람쥐를 만났던 적이 있다. 사람이 곁에 가면 도망치게 마련인데, 이 녀석은 가까이 카메라를 들여대도 익숙한 듯 요지부동(搖之不動)이었다. 세조의 목숨을 지켜줬던 고양이처럼 무언가 암시를 주려던 것일까. 이유야 어찌됐건 절에서 만나는 다람쥐는 늘 반갑다. 그리운 이가 산짐승의 모습으로 잠시 나를 보러 온 듯 여긴다. 조금만 더 머물다 가길 바랄 뿐이다.

또 하나, 상원사에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동종이 있다. 국보 제36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종은 조선 태종 때 불교 탄압을 피해 안동에 잠시 옮겨졌다가, 예종 때인 1469년에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고 한다. 아름다운 전나무숲길을 가진 월정사에서 시작된 선재길의 끝에도 이토록 많은 볼거리가 기다리고 있으니 이 길은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길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월정사 8각9층석탑은 대적광전 앞에 우둑 세워져 있는 월정사를 대표하는 상징의 하나다. 신라시대가 주로 삼층석탑의 시대였다면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형태의 탑이 만들어졌는데, 이 탑은 다각다층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사진=강기석]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하루의 추억이 문득 떠오른다. 몇 해 전 어느 초겨울 이었다. 그해 들어 가장 추웠던 새벽에 무작정 오대산으로 떠났었다. 온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던 매서운 추위 속,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선재길을 걸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그 길의 끝에서 만났던 오대산 수달. 

얼음장 같은 물속에서 자맥질하며, 저만의 유희에 빠져 인간의 침범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손만 뻗으면 닿을 듯 지척에서 수달을 만났던, 마치 꿈을 꾸는 듯했던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나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한다. 천진난만했던 오대천 계곡의 아기 수달은 문수동자의 화신(化身)이 아니었을까.

오대산 선재길은 강원도의 청정한 물과 바람을 맘껏 누리며 행복한 삶, 지혜로운 인생살이에 대해 깊이 성찰할 수 있는 철학자의 길이다. 다정한 이와 함께여도 좋고, 혼자라도 상관없다. 문득 그치지 않는 상념이 나그네의 발길을 무겁게 잡아끌 때면, 맑고 시원한 오대천 계곡에 잠깐 발을 담가 보자. 이 모든 것이 ‘천년의 숲길’ 선재길이 우리에게 주는 고마운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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