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을 아침의 기억이 마치 눈앞에 보이는 듯 생생하다. 서늘한 바람 속 최참판댁에 올라 발아래 펼쳐진 악양 평사리의 황금빛 가을 들판을 바라보던 그때의 감흥이 떠오른다.
잔잔하면서도 무척이나 깊어서 앞으로도 쉽게 잊히지 않을 거 같다. 언제고 다시 찾고 싶은 곳이다. 누군가 그랬던가. 사진에 소리를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리뿐만 아니라 향기까지 담아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거 같다.
가을의 섬진강이라서 더욱 좋았던 것 같다. 전날 내리던 비가 그친 뒤 서늘한 가을바람이 섞인 강 내음은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앞으로도 섬진강을 떠올리면 그날 아침의 물안개와 함께 그 특유의 냄새가 떠오를 것 같다.
강릉 선교장에 갔을 때 멋진 한옥을 짓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곳 평사리 최참판댁에서도 그런 마음이 들었다. 이 중후한 기와집은 드라마 <토지>가 방영되고 나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오래전부터 이곳의 주인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전통 기와집의 매력을 한껏 누릴 수 있는 집이다. 사랑채에 올라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 물줄기와 넉넉한 가을 악양 들판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언제나 마음이 편안해진다. 영영 이 터에 뿌리를 내리고 머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구라도 대문 앞에 서면 “이리 오너라” 하고 크게 소리를 내어보게 된다. 마치 그 옛날 양반이라도 된 것처럼. 이날도 도포 자락 휘날리며 어르신 한 분이 대문에 이르러서는 한바탕 호령을 치시고서는 안으로 들어가셨다.
최참판댁 대문 앞의 코스모스나 악양 들판에서 너울너울 춤추는 코스모스나 애잔하면서도 아름답기는 매한가지다. 가을에 잘 어울리는 꽃이 아닌가 싶다.
일년 중 가장 풍요롭고 풍성한 절정의 순간이면서도, 곧 다가올 죽음을 예감하는 듯한 계절처럼 붉고 흰빛으로 자신을 태우는 코스모스를 마음에 담고 하동을 떠나려 한다. 다시 또 언젠가 이 그림 같은 풍경을 쫓아 악양 들판을 거닐어 볼 날을 기약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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