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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野球·Baseball

1998년 3월, 이만수와 삼성의 엇갈린 운명

by 푸른가람 2010.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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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서랍을 정리하다 예전에 사용하던 노트북에 있던 파일을 구워놓은 CD를 발견했습니다. 신기한 마음에 어떤 것들이 들어 있나 하고 한참을 뒤적거려 봤습니다. 대학교 다니던 시절에 쓰던 자료다 보니 정말 온갖 잡동사니가 다 들어 있더군요. 잃어버렸던 과거의 추억들을 복원한 듯한 기분이 들어 뿌듯하더군요.

그러다가 발견한 한글파일 하나. 작성일이 1998년 3월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2년전의 일이네요. 벌써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파일은 1997년 시즌 종료와 함께 구단과의 마찰로 인해 불명예스러운 은퇴를 하고 홀홀단신 미국으로 떠나야 했던 이만수 선수를 지키려던 팬들의 애절한 마음이 담긴 자료였습니다. 가끔 옛날 일을 떠올리며 술자리의 안주처럼 떠벌리곤 했던 이야기가 그저 추억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다행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다시 한번 그때의 아픈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는, 참 묘한 감정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이 글은 '이만수 선수의 명예로운 은퇴를 바라는 팬들의 요구사항'이란 제목으로 시작됩니다. 밑에 적혀있는 1998년 3월 14일은 아마도 4대통신(천리안, 하이텔, 유니텔, 나우누리) 팬클럽이 삼성 구단 관계자와 대구시내 모처에서 만났던 바로 그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그 저녁모임에서의 불편했던 느낌만은 아직까지 남아 있네요.

6가지의 요구사항이 있었습니다. 성대한 은퇴식 거행, 2년간 해외코치 연수 비용의 구단 지원, 해외연수후 코치직 보장, 22번 영구 결번, 이만수 선수의 명예 회복, 상기 5개 사항의 이행 보장 등이 그것입니다. 당연하게 생각되는 것도 있고, 구단 입장에서 보면 지나치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물론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저 팬들의 요구사항이었기에 그 모든 것을 당당히 요구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봅니다.

당초 대구백화점 앞에서의 서명운동 및 시위 등도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확고했던 이만수 선수가 어느 순간 무너지더군요. 그 오랜 세월 동고동락했고, 자신을 대구의 자존심으로 키워줬던 삼성 구단과의 대립각을 세우기가 부담스러웠던 점도 있었을 겁니다. 미국 연수 이후의 국내 복귀에 있어서 삼성을 빼놓고 생각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겠지요.

결국 그렇게 이만수는 삼성에 백기투항한 채 미국으로 떠났고, 이후 다시 삼성 복귀를 타진했지만 삼성 구단의 배신 덕분에 예상치도 않던 인천에서 제2의 야구인생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상황에서 이만수 코치가 친정팀에 복귀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아마 거의 희박하다고 봅니다. 선동열감독은 5년 계약을 했고, 그의 뒤에서는 김응룡사장이 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파란피의 이만수가 너무 그리워집니다. 선동열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2005년 이후의 삼성은 참 낯섭니다. 한국시리즈를 두해 연속 제패한 강팀으로 군림하는 것 같더니 이내 4위에 턱걸이하기도 힘든 허약한 팀이 되어 버렸습니다. 비록 한국시리즈 우승 문턱에서 번번히 눈물을 흘려야 했던 아픔을 준 팀이지만 한국시리즈 무패의 팀 해태와도 바꿀 수 없는 삼성만의 매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랑스런 전통이 언제부터인가 부끄러운 과거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선동열감독의 과거 4년, 그리고 앞으로의 5년 이후 삼성이라는 팀이 과연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궁금해 집니다. 시계를 12년 전으로 되돌려 그때 삼성이 이만수를 버리지 않았다면, 혹은 팬들이 좀더 가열차게 구단과 싸웠었다면 지금의 삼성과 이만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마지막으로 팬들의 요구사항 원문을 올려 봅니다. 과연 몇가지나 이루어졌을까요? 프랜차이즈 스타와 구단과의 아름다운 이별이 말처럼 쉬운 건 아닌가 봅니다. 지난해 KIA 이종범도 참 힘든 해를 보냈던 적이 있고, KIA 장성호도 말그대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사실 어느 일방을 탓하기도 힘든게 아니겠습니까.



이만수 선수의 명예로운 은퇴를 바라는 팬들의 요구사항

우리는 4대통신(천리안,하이텔,나우누리,유니텔)연합 삼성 라이온즈 팬클럽 회원으로서 금번 삼성 구단측의 이만수 선수에 대한 일방적이고 불명예스러운 은퇴통보와 해외연수 지원불가방침에 대하여 4대통신 연합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야구팬들의 의견을 모아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밝히는 바입니다.

  1. 성대한 은퇴식 거행을 요구합니다.

작년시즌 잠실구장에서 엄숙하게 거행되었던 박철순 선수의 은퇴식은 야구팬 모두의 뇌리에 인상깊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프로야구 16년동안 삼성구단을 위해 열성적으로 뛰었던 이만수 선수의 명성에 걸맞는 성대한 은퇴식(가능하면 은퇴경기)을 4월11일 개막전에 거행할 것을 요구합니다.

  2. 해외연수비용 2년치 지원을 요구합니다.

작년말 TBC와의 인터뷰에서 김종만 단장님이 밝혔듯이 이만수 선수가 2년동안 해외연수하는데 소요되는 비용일체의 구단부담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야구팬들과 지역민들에 대한 공인으로서의 약속이므로 당연히 지켜져야 합니다.

 3. 해외연수후 코치직을 보장해 주십시오.

영원한 삼성맨 이만수 선수에게 해외연수가 끝난후 삼성에서 코치직을 보장해 주시길 바랍니다. 타구단의 관례로 볼 때 이 요구사항도 수용이 가능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4. 22번의 영구결번을 요구합니다.

삼성에서 더 이상 배번 22번을 달고 뛸 수 있는 선수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명문구단으로서의 전통을 만드는 차원에서 22번의 영구결번을 강력히 요구하는 바이며 대구구장에서 22번을 단 깃발이 휘날리는 것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이만수 선수의 명예를 구단에서 회복시켜 주십시오.

그동안 이만수 선수는 구단과 불편한 관계에 있어 언론에서도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경우가 있습니다. 삼성구단측에서 각 언론사와 방송사 등을 통해 이만수 선수의 은퇴에 즈음한 특별회견을 열어서 이만수 선수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길 기대합니다.

 6. 상기 모든 요구사항 이행의지를 확고히 밝혀주십시오.

작년 시즌말에도 구단에서는 지원의사가 있음을 밝힌후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선례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의 요구사항에 대해 명확한 이행의사를 의사결정권이 있는 구단 책임자께서 언론과 방송 등을 통해 확고히 밝혀주시길 요구하는 바입니다.


프로야구 출범이후로 삼성 라이온즈만을 사랑하며 응원해 왔습니다. 매번 정상 일보직전에서 눈물을 곱씹어야 했으며 90년대 팀의 침체기에도 목이 터져라 삼성을 외쳤습니다. 프로야구는 선수와 구단, 팬이 삼위일체가 되어야만 건전한 성장을 이룰 수 있고 이것이 명문구단으로 가는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금번에 저희 4대통신 연합 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이러한 요구사항을 밝히는 것도 모두가 삼성 라이온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해 주시길 바라오며 현명한 판단으로 양측모두가 승리할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1998년 3월 14일

4대통신(천리안,하이텔,나우누리,유니텔)연합 이만수 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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