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시,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홀짝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아주 살짝 감기 기운이 느껴진다. 목이 칼칼한 것이 모처럼만의 노래방 때문은 아닐 것이다. 꿀과 생강을 뜨거운 물에 태워 마셔 본다. 자고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괜찮아졌음 좋겠다. 오늘의 필사는 기형도 시인의 작품이다. 생전 처음 보는 시였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 마치 나 자신의 일처럼 생생하다.
해는 이미 시들어 사방은 어둑해졌을 것이고, 찬밥처럼 방에 담겨진 아이는 두려움과 공포, 배고픔에 떨며 오지 않는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겠지. 어린 아이에게 엄마의 존재란 세상 그 자체다. 오지 않는 엄마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도 같았을테니 그떄의 기억을 떠올린다는 것은 설령 내가 칠팔십을 먹는 노인이 되었다해도 다르지 않겠지.
나를 온전히 지탱해주던 세상이던 엄마는 어느새 연로한 노인이 되었고, 지금의 나는 어릴 적의 엄마보다도 훨씬 더 나이를 많이 먹어 버렸다. 야속한 것이 비단 무심히 흐르는 세월뿐일까. 며칠 전 고향에 들러 잠시 얼굴 보고 점심이라도 같이 먹길 참 잘했단 생각이 든다. 기약 없는 큰 효도보다는 안부 전화 한 통, 함께 먹는 밥 한 끼가 더 소중한 것임을 잘 알면서도 ‘언제나 마음뿐’이라는 핑계는 멈춰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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