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늘 마음에 두고 그리워하던 곳, 화왕산(火旺山) 아래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절 관룡사에 다녀왔다. 한여름 무더위를 묵묵히 견디며 관룡사를 찾았던 것이 엊그제만 같은데 벌써 계절은 가을을 향해 서늘한 바람을 휘감으며 내달리고 있었다.
내게 관룡사라는 절은 두 가지 이미지로 각인(刻印)되어 있다. 마치 병풍처럼 절 뒤편을 두르고 있는 관룡산 병풍바위의 강건(剛健)한 기운과 원음각(圓音閣)에서 땀을 식혀주던 서늘한 바람의 감촉이다.
관룡사가 자리하고 있는 화왕산의 동쪽으로 이어진 산봉우리가 관룡산인데 ‘창녕의 금강산’이라 불릴 만큼 수려(秀麗)한 바위산의 경치를 자랑한다. 관룡사는 큰 규모의 사찰은 아니지만, 기암절벽을 배경으로 가파른 산지의 좁은 땅을 잘 활용해 아담하면서도 단아한 분위기를 자아내기에 한 번도 안 온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한 번만 온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감히 단언한다.
관룡사는 신라 진평왕 5년(583)에 증법국사(證法國師)가 처음 절을 창건해 신라 8대 사찰의 하나로 이름을 떨쳤고, 원효대사가 제자 1천여 명을 데리고 화엄경을 설법한 곳이라고 전한다. ‘관룡사(觀龍寺)’라는 이름은 증법국사가 절을 지을 때 화왕산 위에 있는 세 개 연못에서 용 아홉 마리가 승천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에 연유한다.
절 입구에 당도하면 일주문을 대신해 나지막한 석문(石門)이 찾는 이를 먼저 맞아준다.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비슷한 크기의 둥굴납작한 돌을 쌓아 양쪽으로 담장 형태를 만들고 그 위로 장대석 두 개를 얹은 뒤 기와로 지붕을 올렸다. 절의 소박한 느낌은 이 석문에서부터 비롯된다.
머리를 숙여 석문을 통과해 좁은 길을 걸으면 천왕문이 나온다. 일주문 역할을 하는 석문과 천왕문은 일직선에 놓여 있지 않고 비켜 서 있다. 천왕문을 지나 처음 만나게 되는 전각인 원음각도 누마루 형태의 건물이되, 누문의 역할은 하지 않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가파른 산지에 놓인 관룡사의 입지적 특성 때문으로 여겨진다.
과거의 영화에 비해 절은 조촐하게 구색만 갖추고 있다. 남아 있는 전각이 많지는 않지만, 대웅전(보물 제212호)과 약사전(보물 제146호)에서는 절의 유구한 역사가 느껴진다. 전각들 사이사이로 멀리 병풍바위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모습은 관룡사에서만 볼 수 있는 멋진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기암괴석(奇巖怪石)이 그림처럼 펼쳐져 화려함이 돋보이는 대웅전을 최고로 치는 이도 있으나 전문가들이 관룡사의 백미(白眉)로 여기는 것은 조촐한 규모의 빛바랜 약사전이다. 관룡사의 가람 배치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대웅전의 서쪽 맞은편 모서리에서 비켜서서 서향으로 틀어 앉은 약사전이다.
약사전은 대웅전을 등지고 있어서 대웅전에서 약사전으로 가려면 약사전의 뒷모습을 보며 측면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런 독특한 배치를 두고 전문가들은 “약사전이 자신의 외모에 대해 갖는 대단한 자부심(自負心)의 표현”이라고도 설명하고 있다. 약사전은 앞과 옆, 뒷면까지 사방의 모습이 모두 아름답고 지붕과 벽체의 비례(比例)가 만들어 내는 긴장감(緊張感)이 매우 뛰어나 보물 제146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하나, 관룡사가 유명한 이유는 용선대 때문이다. 관룡사 명부전과 요사채 사이로 난 좁은 오솔길을 따라 20분 정도 올라가면 용선대라는 암봉(巖峰)이 나온다. 산 아래로 탁 트인 전망이 일품인 곳이다. 봉우리 위에는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듯이 해 뜨는 방향으로 좌선하고 있는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
용선대를 오르는 산길에서 바라보면 용선대는 깊은 산골짜기에 갑작스레 가파른 성벽처럼 나타난 거대한 암벽이다. 그 모양이 마치 큰 바다를 항해하는 배를 닮았다 하여 용선대를 ‘반야용선(般若龍船)’에 비유하기도 한다. 용선대를 배로 생각하고 뱃머리에 해당하는 곳에 불상을 놓아 진짜 반야용선으로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용선대에 오르는 것은 극락세계로 가는 반야용선에 타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95호)은 석굴암의 본존과 같은 양식으로 조성된 통일신라 초기(722년) 작품으로서 뛰어난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불상의 수인(手印, 손 모양)은 8세기에 유행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마귀를 항복시키고 이를 지신에게 증명하게 하는 손 자세로,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며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한 채 배 앞에 둔다)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곳에 와서 정성으로 기도를 드리면 한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오랜 세월 동안 모진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한결같은 부처님의 미소로 중생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친견하기 위한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참 좋은데, 정말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라며 안타까워하던 어느 CF가 생각난다. 내가 다녀온 관룡사 역시 정말 좋은데, 어떤 말로 잘 설명할 수 있을지 표현이 정말 궁색(窮塞)하다. 관룡사만의 고요함과 아름다움, 그 풍경 속에서 부질없는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으려면 역시 직접 한번 다녀가시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겠다.
몇 해 전 여름이었던가. 찌는듯한 무더위를 피해 원음각에서 한참을 머물렀었다. 망망무제(茫茫無際)로 펼쳐지는 산 아래 풍경이 무척 시원스럽다. 골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며 무념무상의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백문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가파른 산길을 올라보시라. 대웅전의 석가모니 부처님 앞에 엎드려 있는 동안의 평안, 임진왜란의 전화(戰禍) 속에서도 원형을 잃지 않은 약사전에서 느껴지는 오래된 절집의 멋스러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하기에 관룡사는 잠깐의 수고를 감내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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