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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그리다

고요하고 청순한 아름다움이 넘쳐 흐르는 구례 화엄사

by 푸른가람 2010.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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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그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지리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화엄사를 찾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이번 여름휴가 기간에 하루 시간을 낼 수 있었던 게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이렇게 멋진 곳을 모르고 지냈으면 얼마나 아쉬웠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다. 화엄사는 그 규모에 있어서는 웅장하지만 사람들을 따뜻하게 품어 안아주는 그런 절인 것 같아서 앞으로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화엄사는 조계종 제19교구의 본사다. 여느 조계종 본사들이 그렇듯 본사의 위치에 걸맞는 규모를 자랑한다. 화엄사를 처음 찾는 사람들이면 누구라도 그 웅장함에 절로 탄성을 자아낼 것이 분명하다. 일주문부터 본전인 대웅전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깔끔하고 단아하게 정돈된 모습 그 자체다.





크고 웅장한 사찰에 들어서면 위압감을 느끼는 게 보통이지만 화엄사는 빛바랜 단청 그대로, 이끼낀 돌탑 그대로의 모습에서 천년 고찰다운 세월의 무게와 더불어 정겨움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가 화엄사를 "고요와 청순의 아름다움이 지리산 깊은 산 속에 맥맥히 넘쳐 흐르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고 하는데, 정말 그 느낌 그대로인 것 같다.





화엄사는 화엄경의 두 글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며 백제 성왕 22년(544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보통 신라시대나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사찰에 익숙했었는데 모처럼 머나먼 전라도에서 백제시대 사찰을 볼 수 있게 됐다. 그래서인지 왠지 더 기품있고 단아한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화엄사가 여느 사찰과 구별되는 몇가지가 있다고 한다. 보통의 사찰들이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가람 배치를 하고 있는데 비해 화엄사는 모든 건축물이 태극 형상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태극형상을 직접 확인할 순 없었지만 확실히 다른 절과는 다른 독특한 구조임은 문외한인 나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독특한 구조에서 위압감이 아닌 정겨움을 느낄 수 있었던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든다.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 대웅전에 이르기 전에 보제루를 만나게 된다. 보통은 이 누각의 아래를 통과해서 대웅전에 다다르게 되는데 화엄사의 보제루는 누각 1층의 기둥높이를 낮게 만들어 놓은 탓에 통과할 수는 없고 옆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또한 화엄사가 여타 사찰과 다른 점이라 할 수 있겠다.






보제루를 돌아 오르면 드디어 화엄사의 본당인 대웅전과 각황전 등을 마주할 수 있다. 계단 위 높은 곳에 자리해 있는 데다 각황전은 밖에서 볼 때는 2층 높이의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주위에 명부전, 영전, 원통전 등의 전각이 들어서 있고, 석탑과 석등들이 그 여백을 채워준다. 그 넓은 마당에 섰을 때 나도 모르게 탄성이 절로 새워 나왔다.




각황전은 국보 제67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외부에서 볼때는 2층 형태로 되어 있지만, 안에서 보면 단층 구조이다. 목조건축물 가운데에서 국내 최대규모라 한다. 그 규모에 한번 놀라고, 빛바랜 채로 천년의 세월을 간직하고 있는 단청에 또한번 놀라게 된다. 내가 다녀봤던 수많은 사찰들이 정비, 복원의 이름으로 새단장을 하는 모습을 많이 봤었는데 이곳은 그냥 그 모습 그대로라서 좋았다.




각황전 앞에는 그 위용에 걸맞는 높이 6m가 넘는 석등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석등은 국보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현듯 이 석등에 과거 불이 켜져 있던 모습은 어땠을까 상상을 해보게 된다. 은은하게 새어나온 불빛이 화엄사의 중심인 각황전을 환히 비쳐주고 있었을 듯 하다. 화엄사의 밤풍경이 새삼 궁금해진다. 




 각황전 옆으로 난 108개의 계단을 따로 올라가면 또하나의 국보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  국보 제35호인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이 바로 그것이다.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탑이라는 전설이 있다.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한다. 사면에 세워진 네마리의 사자 머리 위로 삼층짜리 석탑이 올려져 있는 독특한 형태다.




몰랐던 사실인데 이곳 화엄사가 한국전쟁때 소실될 뻔한 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한창중이던 1951년 5월 빨치산 토벌대장을 맡고 있던 차일혁 총경에게 구례 화엄사를 소각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신록이 우거지는 봄철에 사찰이 빨치산의 본거지가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절을 태우는 데는 반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년도 부족하다"는 말로 차 총경은 대웅전 등의 문짝만 떼어내 소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빨치산을 감시하는 데 충분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이 일로 차 총경은 감봉처분 등을 받았지만 천년고찰 화엄사를 지켜낸 공로로 1998년 화엄사에서 공적비를 세운데 이어, 2008년에는 문화재청에서 그의 아들에게 감사장을 전달했다는 얘기다.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자칫 소중한 문화유산이 한줌 재로 사라질뻔 했다고 하니 다시 한번 질곡의 우리 현대사를 생각해 보게 한다. 전쟁 상황에서 상부의 명령을 어겨 가며 화엄사를 지켜낸 차 총경의 용기도 가상하거니와 또 그런 명령을 내릴 수 밖에 없었던 상황도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그 치열했던 이념 대립은 많이 완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마루에 한참을 앉아 화엄사를 마음에 담아보려 노력했다. 아~ 이리도 웅장하면서도 아름답고 단아한 느낌이 드는 절이 또 있을까. 입구에는 교량공사가 한창이고, 일주문을 들어서는 쪽에는 건물 여러채가 새로 지어지는 모양이라 조금 어수선하다. 다음에 화엄사를 찾을 때 쯤이면 온전히 고요하고 청순한 화엄사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안고 화엄사를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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