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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그리다

운조루에서 '他人能解' 베품의 삶을 배우다

by 푸른가람 2010.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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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3대 명당 가운데 한 곳이라는 운조루에 대해 들은 것이 한두달쯤 전이었다. 삼남의 4대 명당이니, 우리나라 3대 명당이니 모두가 제각각인데다, 풍수지리에 대한 지식도 없다 보니 그런 좋은 곳이 있나보다 하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얼마전에 KBS-1TV에서 9시뉴스 방송을 전후해 나오는 '한국의 유산'이라는 짤막한 프로그램에서 생각지도 않던 운조루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기에서는 운조루가 명당이다거나 하는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쌀뒤주를 통해 우리네 조상들의 나눔의 삶, 베품의 정신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 운조루에는 누구나 쉽게 열 수 있어서 필요한만큼 쌀을 가져갈 수 있는 쌀뒤주가 있어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해 준다.



마침 전라도 쪽으로 움직일 기회가 있어서 코스에 운조루도 추가하기로 했다. 운조루는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시대 후기의 전통 양반가옥이다. 원래는 아흔아홉칸 대저택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세월이 흘러 많이 쇠락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 사당 등이 있다.








뒤로는 지리산 노고단이 바라다 보이고, 앞으로는 넓은 들이 있는 천하의 명당 자리라고 한다. 설명하기로는 선녀가 떨어뜨린 반지 모양을 닮았다 하여 '금락환지'라고 불린다. 나름 명당이라고 불리는 몇곳을 다녀봤었는데 가보면 역시 명당은 명당이구나 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 운조루에서는 2백년된 쌀뒤주에 정신이 팔려서인지 '명당' 생각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운조루의 상량문에 따르면 당시 낙안군수를 지냈던 무관 유이주가 조선 영조 52년인 1776년에 건축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 대문과 행랑채 남쪽 마당 건너로 연당(연못)이 지금도 일부 남아 있는데 원래는 2백평이 넘는 큰 규모였다고 한다. 이 연당은 맞은편에 있는 오봉산 삼태봉이 화산이어서 그 화기를 막기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이다. 일반적인 고택에서 볼 수 없는 상당히 특이한 형태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 연당에는 수련과 노랑어리연꽃이 만개해 고풍스런 고택의 멋을 더 해주고 있다.






검색을 하다보니 운조루가 그동안 수많은 방송과 신문에 보도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아흔아홉칸으로 대표되는 조선시대 전통 양반가옥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역시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려했던 '가진 자'들의 나눔의 정신이 빛나서였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그것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 앞서 얘기했던 이백년 넘은 쌀뒤주의 '타인능해'이고, 또하나 큰 규모의 저택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낮은 위치에 있는 굴뚝이다. 굴뚝을 낮게 만든 이유는 밥짓는 연기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한다. 요즘처럼 먹고 살기는 나아졌지만 존경할만한 부자가 없는 세상, 그리고 작지만 내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없어진 세상에서 운조루는 우리들에게 나눔의 미학을 무언으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운조루에는 지금도 그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운조루에서 입장객들에게 천원의 입장료(성인 기준)을 받고 계시는 분이 바로 운조루의 안 주인인 9대 종부 할머니시다. 입구에서도 작은 노점을 차려 이런저런 것들을 팔고 계시는데, 가끔은 입장료를 두고 시비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이왕이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예산지원을 해서 제대로 관리를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대목이다.





운조루(雲鳥樓)라는 이름은 중국의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혜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이다. 3백년전 운조루가 세워졌을 때는 그 이름에 걸맞는 아름다움과 위용을 갖췄을 것이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남은 건물도 많지 않고 담도 허물어졌지만 조상들이 남겨준 따뜻한 정은 지금도 운조루 앞을 흐르는 개울처럼 온전히 흐르고 있을 것이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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