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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그리다

찬란했던 신라불교의 메카 분황사

by 푸른가람 2009.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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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분황사와는 지척에 살았던지라 내겐 아주 익숙한 절이다. 국민학교때는 그저 여느 놀이터가듯 경내에 들어가 이곳저곳을 기웃거렸었다. 분황사 앞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황룡사지 역시 국사 교과서에 나오기 전부터 동네 꼬마들에게는 그저 공터에 불과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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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는 비록 지금은 작은 규모의 사찰로 전락했지만 유명한 절이다. 창건 연대는 신라 선덕여왕 3년인 서기 634년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학계에 이론은 많다. 경북 경주시 구황동(어릴 적 동네 이름을 오랜만에 들어보니 감회가 새롭다)에 자리잡고 있으며 국보 제30호인 모전석탑 등 많은 문화재들을 보유하고 있는 이름난 사찰이다. 요즘에는 분황사앞 황룡사지 넓은 터에 꽃밭을 조성해 많은 이들이 찾아오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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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의 이름을 두고 여러 논란들이 많다. 구체적인 역사적 사료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계에서 대체적으로 인정되는 것을 보자면 분황사의 분(芬)은 범어의 芬陀利(분타리 pundarika)를 의미한다고 한다. '연꽃' 또는 '연꽃이 활짝 핀 모습'을 뜻한다. 진흙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속세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것이 바로 그 연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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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皇)이라는 이름을 속세의 왕보다 높은 개념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분황사의 황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각왕(覺王) 또는 각황(覺皇)으로 일컫는 데서 유래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시 신라에서는 황룡사나 황복사 등 '왕'자 보다는 '황'자를 즐겨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신라 제왕들이 부처의 자손임을 자처하면서 왕보다 한단계 높은 부처님을 황(皇)으로 지칭한데서 연유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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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는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대장경을 가져와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며, 원효대사가 화엄경소 등 수많은 저술을 남긴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분황사 경내에 있는 분황사 모전석탑은 국보 제3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분황사 창건과 함께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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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신라의 탑으로 현재 경주에 현존하는 것은 이 탑이 유일하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돌을 벽돌처럼 가공하여 쌓은 탑으로 사용된 돌은 흑회색의 안산암이었다. 추정하기로는 원래 7층 또는 9층 석탑 규모였을 것이나, 현재는 3층까지만 남아 있다. 3층까지의 높이는 9.25m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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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1층 4면 벽에는 감실이 있고, 감실 입구 좌우에는 화강석판에 인왕상을 조각해 놓았다. 전체적으로 탑의 몸체가 크고 지붕이 작은 형태로 중국 전탑 모양을 모방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조형미가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지만 현존하는 삼국시대 신라의 탑이라는 의미에서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임진왜란때 역시 전란의 영향으로 크게 훼손되었다가 1915년 일본인들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수리, 복원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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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하게 이 절의 당간지주는 분황사 경외에 위치하고 있다. 황룡사지에 자리잡고 있어 이 당간지주가 황룡사의 당간지주인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전해지는 얘기에 따르면 분황사에는 구리 30만 6700근을 들여 만든 약사여래동상이 있었는데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추측해 보건대 그 규모가 엄청났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수많은 문화재들이 끊임없는 전란 통에 모두 소실되어 버린 것이 참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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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시내에서 보문단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사시사철 분황사를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분황사와 접해 있는 황룡사지도 함께 둘러볼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이곳을 찾을때면 몽고침입때 황룡사 9층 목탑이 소실되지 않았다면 이곳은 전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되었으리라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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