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소리길을 걷고 나서 해인사에 들렀다. 물론 해인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 팔만대장경을 모셔놓고 있는 법보사찰로 유명하다. 불보사찰 양산 통도사, 승보사찰 순천 송광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보 사찰 가운데 하나다.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찾는 발걸음이 더 늘어난 것 같다.
때마침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사찰 경내에는 형형색색의 연등이 걸려 있다. 불교 신자들에게는 5월의 신록이 산을 타고 오르고, 연등이 바람에 흔들리며 제 각각의 색이 마치 점으로 아로 새겨지는 요즘이 절을 찾기에 가장 좋은 때가 아닌가 싶다. 무심히 지나는 바람 소리, 계곡의 세찬 물소리에도 불심이 가득 차 있는 시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평일 오후여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덕분에 사람들의 말소리, 발소리가 이따금씩 이는 풍경소리에 묻히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구석구석의 그늘에 앉아 바람에 땀을 식히거나 풍경 소리에 마음을 씻고 있는 듯 보였다. 그네들의 모습이 그렇게 평화로워 보일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불과 얼마만 벗어나도 사람들이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연등으로 환히 밝혀진 산사의 밤을 거닐고 싶다. 부처님 오신 날 무렵의 번잡함은 싫지만 지혜의 밝은 빛이 어둠을 몰아내는 모습이 바로 그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 어둠은 해가 저문 산중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어리석은 욕심으로 눈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탁해지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지독한 어둠인 것 일 수 있다. 그 어둠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욕심이련가.
해인사 일주문에서 천왕문에 이르는 전나무 숲길은 언제나 정겹다.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푸른 기상이 상쾌하다. 그 오랜 세월을 늘 그 자리에 서서 이 길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보았을 이 나무들에게서 삶을 배워본다. 한참을 응시하고 있자니 오늘 이 시간만큼은 이름난 고승대덕보다 이 말없는 생명들이 더 숭고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나 자신이 작은 아기나무가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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