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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즐거움

당분간은 나를 위해서만

by 푸른가람 2012.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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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읽는 책이다. 한번 읽었다고 해서 그 책의 속속을 다 기억할 수는 없는 법. '당분간은 나를 위해서만' 이라는 다소 이기적인 제목을 지닌 이 책은 내게 최갑수라는 사람을 알게 해 준 기분좋은 우연을 가져다 주었다. 아직도 그해 여름 희미한 불빛이 조용한 방안을 비추던 그 희뿌연 느낌 속에서 책장을 넘기던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하다.

왜 한번 읽었던 책을 굳이 다시 읽어보겠다 고집을 피웠는지 나도 모를 일이다. 물론 마음에 드는 작가의 글과 사진을 만나게 해 준 고마운 인연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언젠가는 당연히 잊혀질 뿐일텐데 말이다. 이런 스타일의 에세이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최갑수의 글과 사진이 최고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저 미스테리한 일이라 여길 수 밖에.


최갑수의 첫 여행 에세이면서도 최근에 나온 그의 신간과 비교해 봐도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다. 그냥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시간만 흐른 느낌이라고 할까. 똑같은 글과 사진을 두번째 읽으면서도 어떤 것은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게 느껴졌고, 또 어떤 것은 2009년 여름날의 기억이 너무도 생생해 오히려 놀랍고 슬펐다.

굳이 Sentimental Travel 이란 부연 설명을 해주지 않더라도 그의 글과 사진은 이미 충분히 sentimental하다. 말라 비틀어진 수건마냥 건조해진 사람들에게 센티멘탈해질 것을 권유하기도 하는 그의 충고대로 1호선 전철을 타고 인천으로 가 차이나타운에서 짜장면을 먹고 어슬렁거리다 월미도에서 바다를 바라보다 소래철교에서 소주 한잔을 마시고 나면 조금은 물기가 오르게 될까.

시간이 흘러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그의 고집이 느껴진다. 어찌보면 다소 진부하고 식상하게 느껴질 지도 모를 일이지만 내게는 오히려 또 그것이 반갑다. 단 한번의 일면식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테지만 변함이 없는 그 모습이 좋다. 마치 십수년만에 만났어도 예전 그대로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어서 전혀 어색하지 않은 오랜 친구처럼 반갑다.

언제고 생각나면 꺼내 읽을 수 있어서 좋다. 따뜻한 위안이 필요할 때면 이 책을 통해 그해 여름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일하는 데 여덟 시간, 사랑하는 데 여덟 시간, 자신을 위하는 데 여덟 시간, 이렇게 하루를 삼등분해서 살 수 있다면 충분히 행복할텐데......" 하조대를 거닐던 친구의 말처럼 인생은 간결할 필요가 있고, 가끔은 '나를 위해서만' 살 필요도 있는 것 같다.

"여기에 실린 것은 시도 아니고 산문도 아니고 사진도 아니다. 낯이 뜨겁고 부끄럽다. 이렇게밖에 쓰지 못했나, 이렇게밖에 살지 못했나, 후회가 된다."고 에필로그에서 그는 상투적이고 의례적인 말을 하고 있지만, 그의 마지막 바람처럼 다행히도 이 책이 나에게는 아주 사소한 우연이었으며, 음악이었고, 두서가 없는 행복이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또한 고마웠음을.


인생은 지나가며 사물은 사라지고 풍경은 퇴색한다는 사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
부디, 슬퍼하지는 말자.
우리가 길을 추억하듯, 길은 때로 우리를 추억할 것이니.  - 길은 때로 우리를 추억한다

아직도 그날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날 우리 모두는 정말 행복했다.
너무나 행복해서 오히려 다가올 불행한 날들이 두려워졌을 정도니까.
그런 날들이 우리 기억 속에 분명 하루쯤은 존재하고 있다.
그 하루의 향기가 불행한 날을 잊게 만든다.  - 행복

사람이건 계절이건 바람이건 약속이건
기다린다는 일은 무조건 외롭고 외로운 일.
그 맑고 명징한 외로움을 좋아한다.
그러나 가장 좋아하는 것은 기차에 올라타는 그 순간이다.
너를 만나러 가는 그 순간이다.  - 기차를 기다리며

잔소리 같지만, 인생은 끝까지 가려는 의지이다.
좋든 나쁘든, 살아남든 죽어가든.  - Bravo My Life

이런 해변을 알고 있다는 게 행운이야.
당신과 함께 올 수 있어서 더욱 행운이야.
여행을 다니면서 나만의 해변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여기가 바로 그곳인 것 같아.  - 나의 오래된 해변

서출지에 연꽃이 피었다고 했다.
갔으나 연꽃은 없었다.
연꽃은 그대 마음에 피었겠지...... - 연꽃은 그대 마음에

모든 떠나간 사랑이여,
저 꽃 핀 나무 아래에서처럼,
행복하시길.
부디...... - 사랑이 지나간 자리는 적막할 것이므로

사랑은 버티는 거다.
너를 가지겠다는,
기어이 너를 내 손에 넣고 말겠다는 의지 하나로
버티는 거다.
소금창고는 제 속이 썩는 줄도 모른 채 소금을 안고 서 있다.
......
소금창고는 속으로 울고 있다.
소금이 짠 이유다.  - 기다림의 자세

우리의 하루를 만드는 것은
달 정복도 아니고 어마어마한 금액의 복권 당첨도 아니다.
엽서와 고맙다는 한 마디, 누군가 내 책상 위에 올려다 준, 커피 한 잔.  - 우리를 지탱하는 것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꽃이 피었다.
햇빛이 머물던 자리에는 열매가 맺혔다.
그러니 바람 한줌이
햇빛 한 자락이
지나간 세월이
부질없는 것만은 아니다.
그렇게 불평하며 살 일만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가
이런 꽃 한 송이
열매 한 알을 깊은 곳에 숨겨두고 있다.
때가 되면 피고 열린다.  - 꽃과 열매

땅 끝에서
등만 돌리니 다시 시작이었다.  - 땅 끝에서

알고 있나요?
인생의 한순간이 때로는 인생의 전부일 수도 있다는 사실.
안 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다는 사실.
언제나 시작은 사랑이고 끝도 사랑이라는 사실.
우리가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길이 우리를 잃어버린다는 사실.  - 알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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