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시내에서 감포나 양북 쪽 바닷가로 향하는 국도로 가다보면 기림사나 골굴사로 가는 삼거리를 만난다. 이 길을 따라 쭉 가다보면 가파른 재를 넘어 오어사가 나오고, 조금 더 가면 포항 시내에 진입할 수 있다. 이 길로도 수십번 출장을 다녀서 기림사라는 절이 있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정작 한걸음만 움직이면 닿을 수 있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며칠 전에야 겨우 큰 맘먹고 기림사를 다녀올 수 있었다.
기림사라는 이름은 부처님이 제자들과 함께 수행했던 승원 중에서 첫 손에 꼽히는 기원정사의 숲을 기림이라 하는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기원정사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이 23번의 하안거를 보내신 곳이라고도 한다. 왜 기림사인가 하는 궁금증이 있었는데 다 그런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에 천축국의 승려 광유가 창건해 임정사라 하다가 이후에 원효대사가 중수한 후 이름을 기림사로 바꿨다 한다. 기림사는 또한 임진왜란때 전략적 요충지였던 탓에 경주지역의 승병과 의병 활동의 중심지였다 하니 호국사찰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그리 크지 않은 절이지만 아기자기하고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절에 들어서는 일주문이 너무 새것 느낌이 나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지만 그 아쉬움은 일주문을 들어서자마자 잊혀져 버렸다. 아주 깊은 산골 사찰이 아님에도 절에 입구는 백여미터 남짓한 그 숲길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온통 푸른빛을 더해가는 나뭇잎의 싱그러움이 주는 심리적 안정감에다 계곡에서 들려오는 시원한 물소리, 이름모를 새소리가 어울어져 세상일에 찌든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처럼 포근했다. 언제고 다시 와 한참을 걷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짧지만 긴 숲길이 바로 이 기림사 숲길이 아닌가 싶다.
절 입구에 들어서면 천왕문을 만나게 된다. 천왕문 사이로 고풍찬연한 진남루가 보인다. 진남루도 그렇지만 그 뒷편에 있는 대적광전이나 약사전 등의 건물들도 오랜 세월을 느끼게 한다. 단청의 채색은 모두 바랬고 현판의 글씨들도 희미해져 보인다. 그래도 휘황찬란하게 형형색색의 단청을 새로 칠한 건물들보다 더 정겹게 느껴지는 건 내가 너무 고루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기림사는 범종각을 경계로 신구의 조화가 묘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다. 대적광전을 지나 계단을 올라서면 전혀 다른 느낌의 절을 마주치게 되기 때문이다. 관음전과 삼천불전, 삼성각 등의 건물들은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화사하다. 쇄석으로 바닥을 채운 것도 대적광전이나 진남루 앞의 흙길과는 전혀 다른 감촉을 준다.
때마침 산중에서 들려오는 중장비 소리가 산사의 고요함을 깨운다. 또 새로운 건물을 지으려는 것인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정진하는 스님들에게는 그런 소음마저도 수행의 대상일 지도 모르겠다. 범종각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본다. 목어, 범종, 법고, 운판의 법전사물이 빠짐없이 자리잡고 있다.
유달리 눈에 띄는 것이 목어였다. 분황사에 있던 그것처럼 특이하게 생긴 건 아니었는데 뭐라 그럴까. 진짜 물고기와 많이 흡사하게 생겨서 유달리 이목을 잡아 끌었던 게 아닐까 나름대로 생각해 본다. 목어는 밤에도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처럼 항상 깨어 정진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어느 것 하나에도 큰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 같다.
다시 돌아 나오는 길에 자판기 두대가 나란히 서 있다. 커피와 음료수를 파는 것인데 왠지 이런 고찰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도 어엿하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걸 보니 절로 웃음이 났다. 그래도 사찰에 찻집이 없으면 섭섭할까 싶어 종무소 옆에는 기림차라는 이름의 다실이 있다. 방에 앉아 싱그런 녹음이 한창인 숲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차 한잔 즐겨보는 것도 좋으리라.
기림사를 생각하면 항상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이르는 그 짧은 숲길이 떠오를 것 같다. 아무리 더운 날에도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으로 땀을 식혀줄 것 같고, 졸졸졸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 나무 사이를 날아 다니는 이름모를 산새들의 지저귐이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기림사 숲길. 다음번에 찾아갈 때에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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