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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그리다

영남 사림파의 선구, 회재 이언적을 배향한 옥산서원

by 푸른가람 2010.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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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에 들렀다. 경주에 이십여년 가까이나 살면서도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곳을 정작 경주를 떠나고서야 찾게 되었다는 것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손 잡힐 듯 가까운데 있으니 오늘이 아니라도 언제든 다녀올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 때문에 차일피일 미룬 탓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옥산서원이 불국사나 박물관, 안압지처럼 꼭 들러봐야 할 필수 코스도 아니니까 무관심 속에 방치되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르겠다. 포항에서 영천으로 향하는 28번 국도에서 빠져 나와 북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위치한 옥산서원 입구에 당도하게 된다.



경주야 워낙 국보, 보물이 숱하게 많은 동네다보니 겨우 사적 제154호에 불과한 옥산서원이 크게 눈에 띌 만한 문화재는 아니다. 그래서인지 옥산서원을 마주했을 때 들었던 첫 느낌은 제대로 관심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마을을 지나 옥산서원에 이르는 길가에 이곳에 회재 이언적의 학덕을 기린 서원이 있다는 걸 알릴 수 있는 제대로 된 표지판 하나가 없다는 건 아쉬운 일이다.



회재 이언적은 퇴계나 율곡에 비해 일반인들에게 크게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16세기 영남 사림파의 선구로 추앙받고 있는 유학자이다. 기(氣)보다 이(理)를 중시하는 주리적 성리설이 이후 퇴계 이황에 이르러 영남학파의 중요한 성리설이 되었는데, 주희가 제시한 체제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확립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조선 선조 5년때인 1572년에 당시 경주부윤(지금의 경주시장)을 지냈던 이제윤이 안강의 선비들과 뜻을 모아 서원을 세웠고, 이후 사액을 조정에 요청하여 '옥산'이라는 편액과 서책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회재 이언적을 배향한 서원이니만큼 영남 사림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흥선대원군의 그 유명한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았으나 이후 일제시대때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이후에 복원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 둘러보는 데 그리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는다. 서원의 정문 격인 역락문은 공사중인 탓에 굳게 닫혀있어 옆의 인가쪽으로 나 있는 작은 문을 통해 들어가야 한다. 역락문을 들어서면 무변루라는 누각이 나타나고 그곳을 지나면 마당을 따라 옥산서원 편액이 걸려 있는 강당(구인당)을 만나게 된다.




강당의 좌우로는 유생들의 기숙사 격인 민구재와 암수재가 마주 서 있고, 구인당 뒤편으로는 이언적의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인 체인묘가 있는데 역시 문이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체인묘 양쪽에는 신도비와 전사청, 장판각이 있는데 원래 이 옥산서원에는 서원 문고 가운데 가장 많은 장서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옥산서원 들어가는 마을 초입에 한옥 건물이 새로 지어지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옥산서원과 관련된 기념관이나 그런 목적의 건물이 들어서는 게 아닐까 미루어 짐작해 본다. 아무쪼록 옥산서원이 지닌 본연의 가치에 어울리는 대접을 받을 날이 오게되길 기대해 보면서 발걸음을 되돌린다. 이미 해는 서산으로 지고 주위는 벌써 어두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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