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도 있는 역사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카피라이터 출신의 작가가 쓴 책에 어울리는 적당한 깊이와 또 적당한 재미가 곁들어진 책이란 생각이 든다. <조선임금 잔혹사>를 지은 조민기의 이력이 이채롭다. 그는 한양대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후 영화사를 거쳐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근무하던 중 우연한 기회로 칼럼니스트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은 딱딱하지 않아서 읽기가 편하다. 지나간 역사를 소재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다소 식상하게 읽혀질 수도 있지만 지루하지 않게 재미적인 요소를 많이 가미한 덕분이다. <조선 임금 잔혹사>라는 다소 섬뜩한 제목을 가진 이 책에는 조선의 임금 자리에 올랐던 아홉 명의 군주와, 임금이 되지 못했던 세 명의 세자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그다지 새로운 소재는 아니기 때문에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그동안 여러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아이템이었던 탓에 익숙함이 장점이 될 수도 있겠다. 이 책의 숨겨진 매력은 우리가 지금껏 드라마나 영화로 그려진 이미지로 인해 왜곡되거나 과장되었던 조선의 군주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물론 역사 속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사회를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지금껏 폭군 이미지가 강했던 광해군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 역시 <광해, 왕이 된 남자>라는 영화의 역할도 컸겠지만, 우리 사회 전반의 역사 재인식 분위기도 크게 한몫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며 조선왕조 500년 동안 26명의 왕(대한제국의 순종 제외)이 용상에 올랐지만, 왕과 왕비 사이에서 난 적장자 출신이 극히 드물었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왕조 개창 초기에 유교적 질서를 중시하며 적장자 계승의 전통을 만들고자 했었지만,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은 그 노력을 시작부터 뒤틀리기 만들었고, 두 차례의 반정과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모반과 암살 의혹 등을 살펴보면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왕이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고, 또한 그 자리를 지키는 것 또한 군주 본인 또는 자식들의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할 만큼 고단한 것이었다고 보여진다.
스물 여섯 명의 조선 군주 가운데 이 책에는 성군으로 후세에 추앙받는 세종, 성종, 정조를 비롯해 역사상 가장 무능한 군주라는 오명을 받고 있는 선조, 인조, 폭군의 대명사처럼 불려지는 연산군과 광해군, 수많은 드라마에 나왔던 중종과 숙종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소현세자, 사도세자, 효명세자 등 왕이 되지 못한 비운의 왕세자들의 슬픈 스토리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모두 구구절절 사연이 많겠지만 아버지 인조의 권력욕과 열등감 때문에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 했던 소현세자, 그리고 조선왕조 500년 최대의 궁중 비극으로 손꼽히는 사도세자가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아비와 아들 사이라는 천륜까지도 거스를 밖에 없는 것이 임금의 자리라고 한다면 그들의 역사는 책 제목처럼 '잔혹한 역사' 바로 그것이 맞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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