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이라는 용어는 지금 세대에게는 무척 생소한 단어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태어난 1972년 10월 무렵의 어느 날(정확히는 10월 17일)에 우리나라의 눈부신 산업화를 이끌었다고 칭송받는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은 10.17 특별조치를 발표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10월 유신'이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10월 유신 즈음에 태어난 '유신 키즈'지만, 유신의 맛을 제대로 느껴볼 수는 없었다. 국민학교에 입학해 겨우 사회생활의 맛을 보고 있었던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의 총탄에 서거하고 만 것이다. 어린 기억에도 엄청나게 넓은 실내 공간에 단체로 가서 묵념을 했던 일이 생생히 남아 있다. 무수히 많았던 국화 다발과 향 내음까지도 마치 어제 일처럼 뚜렷하다.
영남지역의 농촌 소도시에서 나고 자랐던 나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큰 인물이었다. 부모님 세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신화는 그 이후로도 한참동안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명문가 집안의 자손이 아닌,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난' 대통령을 처음 가져 본 시골사람들의 눈에 비쳐진 박정희 대통령은 위상은 그만큼 클 수 밖에 없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후 무려 18년 집권기간 동안의 공과에 대해서는 시각이 엇갈린다. 조국 근대화를 이끈 위대한 지도자라는 평가의 뒤에는 4.19 이후 자생적으로 진화하기 시작한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비판도 뒤따른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눈부신 경제 성장 역시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노동자들의 희생, 월남 파병 군인들의 피와 땀 위에 이루어졌다는 지적에 마땅히 반박하기 어려울 것이다.
유신의 시대가 종식된 지도 40여년이 가까워지는 이 시점에 다시 '유신'을 이야기 하는 이유가 무얼까.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유신>의 지은이 한홍구 교수는 "유신이 되살아났다"고 단언한다. 단순히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그 옛날 유신의 향기가 진하게 뿜어져 나옴을 지적하고 있다.
한홍구 교수는 <유신>이라는 책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어두움을 다시 끄집어 낸다. 이념적으로 정반대 편에 설 수 밖에 없는 두 사람의 간격만큼 이 책에서 서술되고 있는 유신시대의 사회상은 절망과 암울함으로 관철되어 있다. 사법살인이라 불리는 인혁당 사건, 김대중 납치사건, 장준하 선생의 죽음, YH 사건에 이르기까지 책에 담겨진 수많은 사건들은 유신의 치부 그 자체들이다.
다시 그 짙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할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역사가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소극으로 두 번 되풀이된다는 말은 역사란 것이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또 무언가 같은 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달라진 점을 정확히 포착하여 비극이 두 번 되풀이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새 세대의 몫이다."라고 말이다.
우리가 우리 역사의 상처를 다시 되짚어 보아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최근 KBS에서 '징비록'이라는 드라마로 방송되고 있기도 한 임진왜란이 그러하고, 씻을 수 없는 삼전도의 치욕을 남긴 병자호란이 그렇다. 가까이로는 식민지 시대가 그렇고, 6.25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단절되지 못하고 있는 비리와 부조리 역시 마찬가지다. 어둠의 과거와 말끔히 단절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우리는 불편한 역사의 민낯을 여러 번 다시 마주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지난 과오를 꼼꼼히 살펴 다시는 그러한 치욕과 아픔과 서러움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바로 그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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