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나서"란 말은 참 따뜻하고 다정하게 느껴진다. 왜 전화했어? 혹은 어쩐 일이야? 라는 물음에는 빙긋 웃으며 "그냥...생각이 나서..." 이런 대답이 제격이다. 얘기하려면 정확한 이유를 대지 못할 것도 없지만, 또 굳이 그렇게 할 필요도 없는 사이 같아서 이런 말을 듣게 되면 저절로 마음이 푸근해질 것 같다.
<생각이 나서> 라는 따뜻한 제목의 에세이집을 펴낸 황경신이라는 이름에서 오래된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아주 자주는 아니었지만, 가끔 PAPER라는 잡지를 사서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 잡지의 앞뒤 어디에선가 분명 그녀의 이름을 봤던 것 같다. 황경신의 글에서는 여전히 PAPER 냄새가 난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 하는 얘기니까 아예 향기가 난다고 해 볼까?
요즘 이런 류의 책들은 흔하다. 사진과 글이 적당하게 나뉘어 각자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사진과 글은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굳이 사진에서 의미를 찾으려 애쓸 필요는 없지만, 독자들에게는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사진과 글들이 작가 황경신에게는 무언가를 매개체로 해 끈끈하고 단단한 인연으로 맺어져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분명 감각적이고 잘 씌어진 글이지만 애석하게도 나와의 궁합은 그다지 좋지 않은 것 같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친해지고 가까와지는 데에는 적당한 시간도 필요하지만 우선은 서로의 마음이 잘 통해야 하듯 작가와 독자 사이에도 공감의 통로가 이어져야 하는 법이다. 황경신과 눈을 맞추고 그녀의 마음에 다다르기 위해선 좀더 많은 인생 공부가 필요할 듯 하다. 그도저도 아니라면 번잡한 요즘의 내 마음을 탓해야 하려나.
잠시 책장에 꽃아 두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이 책을 꺼내 읽어 봐야겠다. 어느 서늘한 가을날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서늘한 바람 속에서 읽어보면 지금과는 다른 감흥을 느낄 수도 있을 거란 기대감이 든다. <보통의 존재> 작가이자 밴드 언니네이발관의 리더인 이석원처럼 누군가의 마음 속에서 산책하고 싶을 때가 오면 다시 이 책을 찾아보리라.
몇 걸음만 천천히 오라, 그대
그대의 숨이 가뿌니
바람이 그대보다 먼저 올 수 있도록
낮은 온도와 속도를 지킬 수 있도록
길을 비켜 달라
몇 걸음만 뒤로 물러나 달라, 그대
그대의 빛이 너무 강하니
내가 어두워지지 않도록
숨거나 달아나지 않도록
마음을 비켜 달라
한때 나를 품고 있던 어둠 속에서
한때 그대를 껴안고 있던 바람 속에서
내가 얼마나 오래 참았는지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기억해 낼 수 있도록
잊지 않을 수 있도록
그러나 무엇이 있을까
우리가 한 번도 이르지 못했던 그 곳에는 - 115. 몇 걸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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