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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오래되고, 낡고, 허물어져 가는 곳인데도 이곳에 오면 언제나 마음이 따뜻해져서 돌아간다. 여러 차례 복원을 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군데군데 금이 가 있고, 천여년의 비바람 속에 으스러진 자국이 남아 있는 두 개의 탑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힘을 얻을 수 있어서 좋은 곳이다.
볼 거리가 많은 곳은 결코 아니다. 그리 넓지 않은 절터에는 휑하니 두개의 탑만이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서 있다. 맞은편에는 산과 들과 강이 어우려져 넓디 넓은 바다로 이어진다. 세찬 바닷바람과 맞닥뜨려야 하는 겨울에는 잠시도 서 있기 어려울 정도로 춥다. 한여름 뙤약볕을 막아줄 것도 없는 이 곳이 왜 이리도 끌리는 것일까.
이 곳에 오면 늘 뒤짐을 지고 여유롭게 몇번을 거닐어 보곤 한다. 이 절의 금당터는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절을 지은 신라 신문왕이 부왕이었던 문무왕의 유지를 받들어 동해 용이 된 부왕이 절에 출입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다고 하는 설화를 떠올리며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
이 탑에만 서면 나는 늘 작아진다. 물론 탑의 높이가 무려 13.4m에 이르니 압도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한 일일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절의 높이보다는 천년 이상을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는 것에서 더 큰 경외감을 느낀다. 이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버겁게 느껴지는데 그토록 오랜 영겁의 세월을 묵묵히 살아왔다는, 엄청난 세월의 무게를 버티고 견뎌 왔음에 고개 숙이게 된다.
이 곳 풍경은 상상력을 일깨워준다. 절 앞의 대종천에 물이 넘실넘실대고, 넓은 들판에는 누렇게 익은 벼들이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그려 본다. 때마침 이는 바람에 풍경소리가 그윽하게 울리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탑 그림자가 동해 바다에까지 길게 늘어지는 한없이 여유롭고 고요한 그림 속에서 나 또한 풍경이 되어 거닐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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