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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그리다

산중에 깊숙히 숨어 있는 산사, 각화사를 찾아서

by 푸른가람 2012.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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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화사 가는 길은 말 그대로 '산사'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산중에 깊이 숨어있는 각화사를 찾아 굽이굽이 산길을 오르고 올랐다. 도중에 과수원도 만나고 인적 드문 산 속에 홀로 있는 집들도 만났다. 아침에 눈 떠서 깊은 밤에 잠들 때까지 이런 풍경을 단 한번도 볼 수 없는 일상의 삶에서 비로소 벗어났음을 실감할 수 있는 순간들이다.






타이어 타는 냄새가 날 정도로 가파른 산길을 올라 마침내 각화사에 이르렀다. 각화사 입구의 푸른 숲이 인상적이었다. 전날의 숙취 때문인지 절 구경보다는 그냥 어느 그늘 시원한 곳에 자리를 깔고 낮잠이나 한숨 자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났다. 5월이라고는 해도 낮기온이 30도를 넘나드는 이른 무더위는 사람을 지치게 하기에 충분한 그런 날이었다.




평지가 없는 산자락에 절이 자리잡다보니 계단과 석축이 많을 수 밖에 없다. 좁은 터에 여러 전각과 당우들이 자리를 잡으려면 필시 이런 형태는 불가피하겠지만 콘크리트, 스테인레스와 같은 재료보다는 돌이나 나무 등을 이용했으면 주변의 자연 풍광과 좀더 잘 조화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긴 했다. 요즘 불사를 일으키는 사찰들을 보면서 공통적으로 드는 생각이다.




예전에는 전국 3대 사찰에 들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절의 규모도 크지 않고 수행하는 스님도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신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찾는 것을 보면 각화사의 명성이 그리 헛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하긴 절이 크건 작건, 스님이나 신자의 수가 많건 적건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싶기도 하다.





소박한 절이지만 이것저것 볼거리가 많다. 대웅전 오르는 길에는 오랜 세월을 느끼게 하는 삼층석탑이 놓여 있다. 근처에 풍성하게 피어난 매발톱꽃이 운치를 더 해주는 느낌이다. 한땀 한땀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문살의 아름다움도 빼놓을 수 없다. 전문가가 아니라 달리 표현할 방법을 알지 못하니 그저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되 우아함을 잃지 않고 색이 곱다라고만 얘기해야겠다.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는 없지만 이번에 각화사를 다녀오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곳을 꼽으라면 바로 이것이라 하겠다. 독특할 것도 없고 절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인데도 난 왜 한동안 이곳 앞에서 멈춰 서 있었던 것이며 굳이 카메라를 들어 사진으로 남겼던 것일까. 묵언의 가르침으로 닫혀진 문 속에 쉼없이 흐르는 시간마저 담아두고 싶었던 것 쯤이라고 해두자.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은 이루 표현하기 어렵다.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으로 우아한 멋을 살린 전각들이 오손도손 사이좋게 놓여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한폭의 그림이다. 그늘에 앉아 잠시 더위를 식히며 건물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욕심이 난다. 언제쯤이면 저런 멋진 한옥을 지어 살아볼까 하는 뜬그름 같은 욕심이 또 마음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욕심 하나 내려놓으려 왔던 산사에서 욕심 하나 채워서 내려가게 된다. 이렇게 또 하루가 간다.




* 각화사 소개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각화산(1,177m) 남쪽에 있는 사찰로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이다. 신라 신문왕 6년인 686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으나 불에 타 버린 것을 고려 예종때 계응이 중건하였다. 1777년(정조 1년)에 이곳에 사고를 지어 왕조실록을 수장하게 하였으며 수행하는 승려가 800여명에 이르러 3대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중요문화재로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9호로 지정된 귀부(龜趺)와 삼층석탑이 있다. 이 중 귀부는 가로 2m, 세로 1.85m의 방형석(方形石) 위에 놓인 길이 1.75m의 것으로서, 시대나 유래 등은 알 수 없으며, 비석이 꽂혔던 자리만 남아 있다. 삼층석탑은 완전히 도괴된 것을 다시 모아 조성한 것으로, 높이는 약 3m이며 체감률이 낮고 상륜부가 없다. 이 절이 있는 석현리와 인접한 서동리의 춘양고등학교(春陽高等學校) 부지에는 각화사의 전신인 남화사지(覽華寺址)가 있다. 원효는 이 절을 이건하여 각화사를 창건한 뒤, 옛 절인 남화사를 생각한다고 하여 각화사라 하였다는 설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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