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충청도 여행의 목적지는 함성호가 지은 '철학으로 읽는 옛집'에 소개되어 있는 충남지역의 옛집들에 대한 끌림 때문이었다. 지난해 엇갈리는 일정 때문에 명재 고택을 찾아보지 못했던 아쉬움이 컸던 차에 논산 인근에 몰려 있는 수많은 옛집들을 한꺼번에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 수많은 행선지 가운데 한 곳이 바로 여기 임이정이다. 임이정은 조선 예학의 종장이라 칭송받는 사계 김장생이 그의 나이 79세에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금강이 굽이쳐 흐르는 강경에 지은 집이다. 임이정의 그 유명한 황산벌의 평야지대에 우뚝 솟아 있어 바로 옆을 흐르는 금강과 더불어 시원스런 전망이 으뜸이다.
임이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데 원래는 황산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었다. 사진에도 잘 드러나지만 정면 세 칸 중에 두 칸을 마루로 삼았고 한 칸을 벽으로 막아 온돌을 들였다. 문이 잠겨 있어 내부를 들여다 볼 수는 없지만 이 온돌방 조차도 삼등분해서 그 한칸의 바닥을 온돌바닥보다 살짝 들어올려 또 하나의 마루를 만들어 둔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함성호는 '철학으로 읽는 옛집'이란 책에서 임이정의 독특한 구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온돌방 안에 마루를 다시 놓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기능적으로 난방을 위한 아궁이를 들이면서 그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을테고, 또다른 하나는 방에서 보이는 금강의 기세를 한번 꺾기 위한 경관의 조정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경관의 조정은 우리 건축의 독특한 방법으로 함성호는 이를 연경(延景)이라 부르고 있다. 연경이란 말 그대로 풍경을 끄는 것이고, 풍경을 간접적으로 조망하게 하는 것이다. 병산서원에 있는 만대루가 그 대표적인 것으로 산이나 강이 지나치게 가까이 있어 그 기세가 다분히 위압적일 경우 집과 자연 사이에 누마루나 구조물을 두어 풍경을 확보하면서도 거리를 연장하는 방법이다.
독특하게도 임이정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보통의 집이 남향하고 있는 것에 비해 바로 옆을 유유히 흐르는 금강이 눈앞에 보여 전망이 너무나 시원스럽고 호쾌하다. 남으로는 드넓은 강경의 평야지대가 놓여 있고, 서로는 강경 포구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한없이 넉넉한 품으로 대지를 적셔주는 금강이 흘러간다. 양택에서는 최고의 명당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사계 김장생은 이런 역동성이 넘쳐 흐르는 곳에 정자를 지어 후학을 양성했다. 이 집은 이(理)와 기(氣)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현실을 무시한 이론은 존재할 수 없다는 현실주의자 김장생의 삶을 닮아 있다 할 수 있겠다. 17세기 상업자본의 역동성을 간직한 강경에 자리잡고 있는 임이정에서 말없이 흐르는 금강을 바라보며 현실주의자의 포석을 엿보는 것도 괜찮은 일일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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