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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즐거움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by 푸른가람 2011.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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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분의 글을 읽는 기분은 새삼스럽습니다. 하긴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책들 역시 수백, 수천년 전에 이 세상을 살았던 분들의 글이긴 하지만 불과 몇 해전, 혹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같은 하늘 아래 숨쉬고 살았을 분들의 흔적을 이렇게 글로 다시 되새길 수 있다는 것도 큰 선물인 것 같습니다.

영문학자이자 수필가인 장영희 교수가 샘터에 연재했던 글들을 엮은 이 책은 2009년 5월 12일에 출간됐습니다. 장영희 교수가 그해 5월 9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마지막 유작인 셈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삶의 희망을 얘기하고자 했던 그분의 마음 씀씀이가 곳곳에 묻어 있습니다. 분명 이 책을 통해 따뜻한 위안을 받고,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 독자들도 많을 겁니다.


책의 제목을 두고 고민을 한 흔적을 책의 서문에서 충분히 느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몇 개의 후보 중에 결국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 최종 낙점을 받았지만 이 것 역시 처음에는 불합격을 받았던 제목이라 합니다. 스스로도 다시는 그런 기적같은 삶을  살기가 싫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눈곱만큼도 기적의 기미가 없는, 절대 기적일 수 없는 완벽하게 예측 가능하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는 그의 간절한 소망이 충분히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미루어 짐작하기 조차 어려운 고통이었을 겁니다. 생후 1년만에 소아바비를 겪어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야 했고, 말년에는 무려 세번씩이나 암이라는 병마와 싸워야 했던, 어찌보면 지독히도 불행했던 한 인간이 이 세상에 남긴 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따뜻하면서도 지극히 담담합니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어땠을까요. 하늘은 왜 내게만 이런 엄청난 시련과 고통을 주는 것일까 생의 매 순간순간을 누군가를 원망하며, 지독한 절망감에 스스로를 저주하며 살아갈 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부터가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마음 먹기 나름이라고 하지만 장영희 교수가 그랬던 것처럼 기적같은 삶을 살아낼 수 있을 지 자신이 없습니다.


남을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이 말은 여러 책에서 많이 접하게 되는 명언입니다만 한편 고개를 갸웃 거리게 만드는 말이기도 합니다. 비가 오면 상대가 비를 맞지 않게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더 낫지, 같이 비를 맞아주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 어리석은 생각을 해 본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이 말이 지닌 참뜻을 이제는 어렴풋 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산을 들어서 그 사람이 비를 맞지 않게 하는 것도 물론 충분히 의미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깊은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나아가 나의 슬픔으로까지 공감해 주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함께 비를 맞는다는 것은 한편 바보같은 일 같지만 그의 슬픔속으로 들어가 함께 젖어갈 수 있을만큼 넓고도 깊은 마음인 것이니까요.


못했지만 잘했어요

영어에서 쓰는 수사법 가운데 옥시모론(oxymoron)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서로 상반되는 의미의 단어를 합께 배치해서 상황을 강조하는 비유법인데 우리 말로는 '모순형용법'이라고 합니다. 이 책에 담겨진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못했지만 잘했어요'라는 진호의 모순형용이 유독 기억에 남네요. 

장영희 교수는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기쁜 사람과 슬픈 사람이 서로 함께 어울려, 보듬어 주며 살아가는 이 세상이야말로 제일 좋은 모순형용법의 예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사랑의 마음이야말로 최고의 모순형용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못났지만 잘 나 보이고, 모자라고 부족하지만 그냥 그것으로 충분한, 사람에 대한 진실된 사랑 말입니다.


행복의 세가지 조건은 사랑하는 사람들, 내일을 위한 희망, 그리고 나의 능력과 재능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른 사람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 에리히 프롬

'너만이 너다' - 이보다 더 의미있고 풍요로운 말은 없다. - 세익스피어

오늘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 마크 트웨인

소금 3퍼센트가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 우리 마음에 나쁜 생각이 있어도 3퍼센트의 좋은 생각이 우리의 삶을 지탱해 준다.

스스로를 신뢰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성실할 수 있다.

바닷가에 매어 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인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 - 김종삼의 '어부'


기적이라는 말을 사전에서는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 또는 '신에 의하여 행해졌다고 믿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겨운 일상의 반복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또 어떤 이에게는 기적일 수도 있겠지요. 저 역시도 남은 인생에 꿈꾸고 있는 기적 하나가 있습니다.

기적, 그것은 분명 쉬 내게 와주는 것은 아닐테지만 간절히 바라고, 터벅터벅 쉼없이 걸어간다면 언젠가는 또 만나게 될 수도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 보려 합니다. 내 마음 속에 남아 있을 3퍼센트의 좋은 생각으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나)비가 되기 위해, 새처럼 자유롭게, 나만의 불가사리를 한마리 두마리 늘여 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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