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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野球·Baseball

老兵은 죽지 않고 다시 復活할 뿐이다.

by 푸른가람 2007.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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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멋대로 꼽아본 2007년 프로야구 10대 뉴스(2)

프로야구 선수의 정년은 만35세? 1990년 서울민사지법에서 프로야구 선수의 정년에 대해 만35세로 봐야 한다는 판결을 한 적이 있다. 1986년 교통사고로 선수생명이 끝난 당시 MBC청룡 김경표 선수의 손해배상 소송에 대해 사법부에서 내린 프로야구 선수의 정년에 대한 명시적으로 판단이었다. 이는 현재까지도 공식적인 판단의 준거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올시즌 프로야구에서는 정년을 무한연장하는 선수가 있었으니 그 주인공은 바로 나이를 거꾸로 먹으며 날로 위풍당당해지고 있는 양준혁이다.


위풍당당 양준혁, 신의 대열에 합류하다.

동기들보다 한해 늦은 1993년 삼성 유니폼을 입고 프로무대에 뛰어든 양준혁. 입단 첫해 방위병으로 홈경기에만 출장하면서도 타율, 홈런, 타점 등 타격 전부문에 걸쳐 톱랭커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팀선배 김성래, 강기웅과 벌인 타격부문 집안싸움은 뉴스거리였다. 자고 일어나면 순위가 뒤바뀌는 홈런왕 경쟁에서 승리한 김성래가 결국 그해 MVP를, 양준혁이 이종범을 누르고 신인왕에 올랐다. 지난해 류현진이 MVP, 신인왕 동시석권이라는 전무후무한 사고를 일으켰지만, 사실 1993년 양준혁이 그 원조가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팬들도 많을 것이다.

방망이를 거꾸로 잡고도 3할을 친다던 장효조가 현역에서 떠난 빈자리를 대구상고 후배인 양준혁이 빈틈없이 메웠다. 1993년 .341을 시작으로 2001년까지 단 한해도 3할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물론 그사이 양준혁에게도 시련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개인성적은 훌륭했지만 안타깝게도 소속팀 삼성은 80년대 전성기를 지나 90년대 중반이후 급격한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양준혁 개인의 부침도 팀성적과 무관할 수는 없었고, 결국 1999년 그는 임창용과 트레이드되며 고향 대구를 떠나게 된다.

해태, LG를 거쳐 다시 친정팀으로 복귀한 2002년. 그의 의지와 팬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프로입단후 처음으로 2할대 타율에 머물고 말았다. 2할7푼6리라는 타율은 양준혁에게는 수긍하기 힘든 성적이었다. 한물갔다는 얘기들이 나올만한 시점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최악의 성적을 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소속팀 삼성은 첫 한국시리즈 무관의 한을 풀게 된다.

절치부심 끝에 2003년 다시 .329의 타율에 33홈런으로 기량이 녹슬지 않았음을 과시한 양준혁은 2005년 또한번 추락을 맛보게 된다. 2할6푼1리라는 최악의 성적을 낸 것이다. 공교롭게도 팀은 2002년에 이어 한국시리즈 정상을 밟게 된다. 양준혁이 3할 타율달성에 실패하면 삼성이 한국시리즈에 우승한다는 묘한 징크스가 생기게 된 것. 이제는 은퇴시기를 고려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6년 .303로 3할 타자대열에 재입성한데 이어 2007년에는 .337로 막판까지 타격왕 싸움에 불을 지폈고 22홈런, 20도루로 프로에서 세번째 20-20 클럽에 가입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프로 첫 통산 2,000안타라는 전인미답의 고지를 처음으로 밟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그의 평소 지론을 몸소 실천한 셈이다.

어느새 불혹을 바라보는 양준혁. 내야땅볼을 치고도 1루까지 전력질주하는 진정한 프로선수. 먼훗날 그의 이름 석자를 빼고 2007년 프로야구를 추억할 수 있을까? 아직 달려가야 할 길이 멀다. 상에는 그다지 욕심이 없다지만 시즌 MVP 한번쯤은 타보고 은퇴하려면 좀더 힘을 내야 한다. 그의 아름다운 도전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관심을 갖고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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