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황경신은 밤 열한 시를 두고 참 좋은 시간이라 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할 만큼 했으니 마음을 좀 놓아볼까 하는 시간이며,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해 어떤 기대를 품어도 괜찮고, 일어나지 않은 모든 일들에 대해 그저 포기하기에도 괜찮은 시간이라며. 하루가 다 지나고 또 다른 하루는 멀리 있기에 가던 길을 멈추고 생각을 멈추고 사랑도 멈추고 모든 걸 멈출 수 있는 시간이라서 참 좋단다.
요즘의 내게 있어서 밤 열한 시는 조금 애매한 시간이다. 뭔가를 새로 시작하기에는 부족한 듯 하고, 그렇다고 하던 일을 접고 잠자리에 들기에는 아까운 시간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 시간은 내 삶에서 부재의 시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존재하기는 하되, 무위의 시간이라서 도통 이루어지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서글픈 흔적과도 같겠다.
황경신의 전작 <생각이 나서>를 읽고 나서도 마음에 콱 박히는 강렬함이나 수채화처럼 마음에 스며드는 잔잔함이 없었는데, 그 후에 나온 <밤 열한 시>라는 책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녀의 글은 하나같이 정제되고 세련되었으며 맛깔나게 씌어졌지만 여전히 그 깊은 맛을 느끼기에 나의 혀는 딱딱히 굳어버린 것 같아 두려운 마음이 든다.
조금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을 만난 것 같다. 그녀의 얘기를 활자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음 한켠이 아려오거나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경험은 쉽지 않다.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한 걸음에 뛰어 넘을 수 없는 만큼의 간격이 분명 존재하는 것 같다.
수많은 글을 읽으면서 글을 잘 쓴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읽어내는 능력이 우선이란 걸 여러번 절감하게 된다. 읽고 이해할 깜냥이 되지 못하는 이에게 명문이 무슨 소용일까. 밤 열한 시의 풍부한 감성에서 저만치 비켜나 있는 삶의 궤적을 다시금 돌려놓으려는 노력을 해봐야겠다. "삶이 삐걱거리는 건, 그 잔뼈들이 조금씩 어긋나는 건, 아마도 다시 맞춰지기 위해"라는 황경신 작가의 말에서 작은 위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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