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읽는 즐거움

철학으로 읽는 옛집

by 푸른가람 2012. 1. 14.
728x90

일단 제목에서부터 눈길이, 마음이 이끌리는 책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오래된 우리 옛집들이 지난 아름다움과 가치에 대해 알아가고 싶은 나를 위한 책이었다고 밖에. '집짓는 시인' 함성호가 쓰고 유동영이 사진을 찍은 '철학으로 읽는 옛집'이란 책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학자들의 집과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깊은 철학적 사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굳이 철학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은 유학의 좁은 틀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쉽기는 하다. 하긴 유학, 그 중에서도 성리학을 빼고 우리의 철학을 얘기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긴 하겠지만 노론 300년이 지배한 역사 탓에 사상과 학문, 철학의 스펙트럼이 다양성을 띠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우리 역사의 또다른 아픔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회재 이언적의 독락당을 시작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들이 직접 지은 집들이 차례차례 소개되고 있다. 얼마 전에 경주 옥산서원을 찾았던 길에 지척에 회재 선생의 고택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독락당에 들렀던 적이 있어 유달리 반가움을 느꼈다. 독락당으로 인해 좀더 책 속에 빠져들 수 있었음 또한 다 그럴 인연이었던 것이 아닐까.

지은이가 얘기하듯 독락당 풍경의 백미는 바로 곁을 흐르는 옥계천 속에 마치 하나의 풍경으로 녹아 들어가 있는 계정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닫혀 있고,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지을 수 없었던 독락당 내부와 달리 이곳의 느낌은 완연히 다르다. 물이 흐르고, 바람이 흐르고, 시간이 흘러가듯 이 곳에서 회재는 세상과 소통하고 싶은 속마음을 그렇게 달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삶에 있어서 가장 불우한 시절을 보냈던 시기에 지었던 이 독락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회재의 또다른 흔적이 남아 있는 향단이 있다. 향단은 얼마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주 양동마을을 대표하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7년에 이르는 독락당 시절의 불우한 시절을 견뎌내고 복권되어 경상감사로 제수된 이후 외가가 있던 양동에 자신의 건재함을 드러내기 위해 세웠던 집이었고 이후 양동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 두 집안의 유구한 세거지로 현재까지 남아 있다.

향단을 두고 지은이는 '한국 건축의 수수께끼'라고 했다. 지금껏 많은 사람들의 향단을 설명했지만 여전히 미심쩍은 의문이 남아 있다는 것은 향단이 다른 전통 건축의 공간과는 달리 우리의 기본적인 지식과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향단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하나의 단서로 '보이지 않는 집'이라는 화두를 내어 놓았다.

향단에 여러차례 가 본 적이 있다. 지금은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향단 안으로 들어가기가 어렵지만 예전만 해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건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나 역시도 향단은 독특한 집이었고, 뭔가 감추어지고 닫혀진 느낌이 강했던 기억이 지금껏 남아 있다. 몇장의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향단은 이제는 더이상 맘대로 드나들 수 없어 더 아련하다.

회재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불우한 시절이 담겨져 있는 집인 독락당은 너무나도 여유롭고 완완한 데 비해 화려한 시절의 집인 향단은 지극히 폐쇄적이고 우울한 느낌을 주고 있다는 것을 지은이는 이상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한술 더 떠 향단은 감옥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은 결국 '풍수'로 귀결되어 지는데, 다시 정계에 복귀한 회재가 쓰라린 시절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염원을 풍수를 빌려 구현했다고 보는 것이다.

책에 소개되어 있는 옛집 중에 겨우 회재의 독락당과 향단, 퇴계의 도산서당 만을 직접 보았을 뿐이다. 책을 보고 있자니 마음은 벌써 지리산 산자락 아래로, 붉디붉은 동백꽃과 담백한 차향이 느껴지는 듯한 강진으로, 남도의 거친 파도 너머 보길도로, 금강과 넓은 황산벌이 내려다보이는 강경의 언덕 위로, 화양구곡의 절경 속으로 빠져들어 있는 듯 하다.

남명의 추상같은 자기 절제의 정신이 배어있을 지리산의 산천재, 해상의 도학자 윤선도가 남긴 보길도의 세연정, 고난한 유배생활에서도 결코 자신을 놓지 않았던 다산을 만날 수 있는 강진의 다산초당, 현실주의자 김장생의 임이정, 우암 송시열이 남긴 우암고택, 팔괘정, 남간정사의 흔적들, 윤증 고택을 향한 발걸음도 서둘러야겠다. 마음이 급하다. 봄은 어디쯤 오고 있으려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