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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그리다

몽룡과 춘향이 사랑을 속삭였던 남원 광한루

by 푸른가람 2009.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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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촌놈이 사진을 취미로 삼게 된 덕분에 그 유명한 남원 광한루에 가보게 됐다. 때는 2007년 3월 중순. 사진동호회의 영,호남 지역 회원들이 처음으로 연합출사를 나가게 되었는데 그 행선지 중 한곳이 남원 광한루였다. 꽃샘추위도 끝나고 바야흐로 봄의 기운이 충만할 때였다. 다행히 날씨도 좋고, 출사코스도 맘에 들어서였던지 수십명의 회원들이 모여 성황을 이뤘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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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는 춘향전의 배경으로 유명하다. 춘향에 대한 얘기를 다룬 영화를 보면 몽룡과 춘향이 광한루에서 그네를 뛰던 장면이 빠지지 않고 나왔던 것 같다. 물론 춘향전이야 설화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었으니 실제로 이곳에서 몽룡과 춘향이 사랑을 속삭였을리도 만무하지만, 그들의 존재를 느낄만한 별다른 소재가 없으니 섭섭하기는 했다. 춘향테마파크라는 곳이 있긴 하지만 들러보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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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281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유명한 재상인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되었을 때 지었던 것으로 원래 이름은 광통루(廣通樓)라 했다 한다. 지금처럼 광한루라 불리게 된 것은 이후 세종 16년(1434년)에 정인지가 고쳐 세운뒤 바꾼 이후부터다.  지금의 누각은 정유재란때 불타 없어진 것을 인조때 다시 지은 것이며 부속건물은 정조때 세운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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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방문때 기대가 컸던 탓에 실망도 컸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넓은 인공정원이 꽤 괜찮았던 것 같다. 연합출사를 공동주관하느라 사실 광한루 자체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즐기지는 못했다는 아쉬움도 든다. 다시 한번 시간을 내서 전라도 일대의 숨겨진 보물찾기를 떠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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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가 별도로 있어 광한루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얻을 수 있다. 홈페이지 주소는 광한루원( http://www.gwanghallu.or.kr/ )이며 참고삼아 광한루원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는 설립배경을 함께 올려 본다. 광한루를 찾을 분들에게는 분명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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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원은 우리나라 4대 누각의 하나인 광한루와 더불어 하늘의 옥황상제가 살던 궁전 「광한청허부」를 지상에 건설한 인간이 신선이 되고픈 이상향으로 월궁의 광한청허부와 같다하여 얻어진 이름이다.
시인묵객들은 궁궐에는 경회루가 있고, 지방에는 광한루와 더불어 평양의 부벽루,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누각이라 불려지는데 그 중 으뜸은 광한루라 했다.
경회루는 궁궐의 건물로 황실에서 지은 곳이며 지방의 누각 중 평양의 부벽루는 애석하게도 아직은 가볼 수 없는 곳이고, 진주 촉석루는 안타깝게도 6ㆍ25 때 불에 타 지금의 건물은 1960년 5월경 복원한 것으로 복원 역사가 짧으며, 밀양의 영남루 역시 1844년에 지어 복원 역사가 길지 않다. 그러나 광한루는 1419년에 지어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탔으나 1626년에 복원한 건물로 복원 역사 면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광한루원은 경복궁 경회루의 지원과 전남 담양군에 있는 양산보가 조성한 소쇄원과 함께 한국의 경원을 대표할 만큼 우수하며 독특한 조경양식이 탄생하는 모체가 되고 있다.
정원의 사상적, 역사적 배경은 자연적 사고방식 즉, 신선사상과 음양오행사상, 풍수지리사상 또는 수심양성의 도로 표현되는 송, 죽, 국, 매의 사절과 유교의 선비사상이다. 그중에서도 신선사상이 가장 크다고 불 수 있으며 이러한 신선정원의 양식은 생성시기인 조선시대의 제도적인 원인에 기인하여 유교문화가 지방으로 분산되면서 형성되었다.
옛적 우리 조상들은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조성에 세심한 배려를 하여 신선이 사는 이상향을 이 땅에 건립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생각은 분합문을 달아 열어놓고 지내어 건물이 탁 트이게 처리하였다. 또한 누원 앞에 호수는 은하를 상징하도록 하여 하늘의 옥황상제가 사는 곳처럼 꾸며서 월궁의 광한청허부와 같다고 한 광한루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정원은 인공적인 멋을 가리지 않고 토양 구릉을 자연 그대로 살렸으며, 드문드문 자연석 고인돌을 구릉에 그대로 놓아 작은 언덕 공간처럼 하고, 정원수도 전지를 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자라도록 하여 흡사 숲속에 있는 착각이 들게 한다.
이러한 연유로 건축기술과 사회상, 생활, 이상향 등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명승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현재의 누원 모습은 누원 근처 시장이 불타고 옮긴 것을 비롯하여 수차례 확장 사업을 하면서 차례로 근처의 부지를 매입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광한루원<廣寒樓苑>은 근세 전기에 조영된 대표적인 정원으로 꼽히고 있는데 한국의 독특한 조경양식이 탄생하는데 모체가 되고 있으며 정원을 대표할 수 있을 만큼 질적으로 우수하고 통시대적 문학사에 나타난 정원양식을 표현하고 있어 전통예술을 계승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광한루원 앞에는 동서 100m, 남북 59m에 이르는 정방형의 호수와 호수 속의 3개의 섬(삼신산), 그리고 서편에 4개의 홍예로 구성된 오작교로 구성되어 있다. 오작교는 평교지만 교각의 형태가 원형으로 된 홍예교로 누정원을 구성하는 구성물의 일부로 처리되어 있는데 직선적이고 평탄한 노면에 율동감을 주어 경관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요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호수에 직녀가 베를 짤 때 베틀을 고이는 돌인 지기석을 넣고 견우가 은하수를 건널 때 쓰는 배인 상한사를 띄워 칠월 칠석의 전설의 은하수와 오작교를 상징한다.
호수는 현재 상태에서 1:2의 비를 갖는 장방형으로 축조되어 있으며 그 안에 3개의 섬이 동서방향으로 거의 같은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호수 북쪽 광한루 앞에는 돌 자라가 동남방향으로 향해 놓여 있어 신선사상에 입각한 지킴이의 기능을 갖고 있어 전체적으로 광한루원의 구성은 넓은 은하세계, 즉 천체우주를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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