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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즐거움

두 얼굴의 조선사 - 군자의 얼굴을 한 야만의 오백 년

by 푸른가람 2016.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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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의 얼굴을 한 야만의 오백 년. <두 얼굴의 조선사>를 쓴 다큐멘터리 작가 조윤민의 조선왕조에 대한 평가는 무척 신랄하다. 책 머리에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그는 조선 시대 양반 지배층을 도덕의 가면을 쓴 위선적 존재로 인식했다. 그런 지배층의 지배 하에 5백 년 이상을 유지한 조선 왕조 역시 좋은 평가를 받을 리 만무할 터.

삼백 여 페이지가 넘는 책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이미지는 하나같이 부정적이다. 조선왕조의 지배층은 물론, 그 시대의 지배 철학, 제도, 사회, 외교 등 전반에 대해 지은이는 혐오에 가까울 정도의 비판을 가하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한편은 그의 지적에 공감할 때도 있었지만, 지나치게 공격적이기만 한 그의 신념을 견고하게 만든 원인은 무엇일 지도 궁금해졌다.

궁금증에 대한 해답의 단서는 프롤로그에서 살짝 엿볼 수 있다. 폭정과 야만의 시대로 일컬어지던 17세기 유렵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이사크 포시위스는 유럽의 동쪽 끝에 있는 조선과 중국을 이상국가로 소개했다. 철인왕이 통치하는 플라톤의 유토피아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나라쯤으로 말이다.

그의 책 <여러 가지 언설>에서는 중국과 조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과 조선의 고위관료들은 철학자들이다. 나라를 통치하는 이들 철학자들이 충실하지 못하면 인민이 이들을 판정할 자유를 갖는다. 이 나라에는 유럽과 같은 세습귀족이 없고, 배운 자들만이 귀한 대접을 받는다. 왕이 잘못을 저지르면 철학자들은 주저없이 왕을 비판한다. 이는 구악의 위대한 예언자들조차 감히 하지 못했던 수준이다."

물론, 이사크 포시위스의 주장은 정확하지 못하다. 머나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앞섰던 탓인지, 중국과 조선에 대한 그의 기술은 지나치게 이상적이어서 낭만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조윤민 작가 역시 이사크 포시위스의 조선에 대한 환상에 대해 조목조목 사례를 들어 반박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대해 조금은 과대포장된 부분에 대한 반감이 <두 얼굴의 조선사>란 책이 출간된 이유라고 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인간 세상에서 이상적인 국가나 사회조직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유구한 역사를 통해 명멸을 거듭한 수많은 국가들은 양면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동 시대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혹은 이전 시대의 실패를 교훈삼아, 더 나은 국가체계와 사회 제도를 구축하려 했던 노력들이 성공의 열매를 맺기도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이 책은 <두 얼굴의 조선사>는 조금 불편하다. 마치 잘 정리된 논문처럼 사서와 여러 인용문헌들을 통해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참혹상을 다시금 되돌아 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지만, 유독 조선이란 왕정 국가에 대해 폄하에 가까운 비난을 하는 것은 지나쳐 보인다.

그는 조선시대를 통해 우리 역사가 자율적으로 진보, 발전해 나갔던 동력을 부정하고 있다. 왕조 교체기에 조선 건국의 주체세력으로 활동했던 신진 사대부나, 훈구세력과의 대립 속에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던 16세기 사림 역시 그에게는 알맹이는 그대로인데, 포장지만 바뀐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이는 자율적인 역사 발전의 능력이 없었다고 폄하하는 일본의 식민사관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고도 보여진다.

편협함은 역사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한다. 지은이 역시 이런 비판적인 시각을 의식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저자 스스로는 부정적 시각에서 조선시대를 폄하하는 뉴라이트 역사학을 옹호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으며, 민중사관을 치켜 세우려는 것도 아니라고 변호한다. 다른 것은 차지하더라도 다가올 날에는 일부 지배층의 과도한 욕망과 편중된 이익의 정치가 누그러지길 그의 바람에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어지러운 시대는 계속되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커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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