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에세이류는 언제나 나의 구미를 당기는 책이다. 이름난 작가의 책은 물론이거니와 제 아무리 '듣보잡'이라 한들 여행과 사진에 관한 책은 허투루 보아 넘기기 어렵다. 인터넷 서점을 둘러보다 조은 시인의 여행산문집을 아주 우연하게 발견하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책을 구매했다.
2009년 11월에 초판 1쇄가 나왔으니 한참 지난 책이긴 하지만 오히려 조금은 오래된 사진과 글들을 통해서 이제는 사라져버렸을 지도 모를 국내 여행지의 매력을 되살려 추억해 볼 수도 있으니 더욱 좋다. 조은 시인의 여행 에세이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마치 잘 숙성된 음식을 맛보는 것과도 같은 묵직함과 깊음이 묻어 나오는 글들이었으니.
역시 시인의 글은 뭔가 다른 것 같다. 그럼으로 인해 얼마간의 간격과 괴리가 느껴지기는 하지만, 보통 사람의 감성과 인식세계로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일깨워 주니 참 고마운 존재가 아닌가. 1960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으니 경상도만의 독특한 감성을 어느 정도는 공유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국내 여행에세이에서 쉽사리 볼 수 없는 나의 고향이 짤막하게나마 소개되어 있던 것도 호감에 한몫 톡톡히 했다는 걸 부인하긴 어렵겠다.
요즘은 국내여행 에세이를 접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해외여행이 쉬워진 시대인 탓에 북미나 호주, 유렵처럼 전통적인 인기 해외여행지 뿐만 아니라 남미, 아프리카 오지 까지도 책을 통해 그 속살을 훔쳐볼 수 있게 되었지만, 오히려 우리 땅 구석구석에 숨겨져 있는 보물같은 여행지를 소개해는 책을 구경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척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은 시인은 <낯선 길로 돌아오다>는 책에서 스물 한 곳의 국내 여행지와 어울어진 추억 보따리들을 풀어놓고 있다. 다만 일반적인 여행 에세이와는 다르게 여행지에 대한 자세한 소개 보다는 그 특정 장소와 얽히고 섥혀있는 그녀의 기억들이 시인만의 감성이 담긴 언어를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그녀의 첫 시집제목인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주지 않는다> 에서 짐작할 수 있듯 삶과 죽음의 본질에 대한 통찰이 대부분의 글들을 관통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글은 조금은 무겁고 우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옛날의 여행이 대상에 집중하기 위해 고독해지려 안간힘을 썼던 여행이라면, 다시 시작한 여행은 마음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 했다는 그녀의 고백이 무척 반갑게 느껴진다.
내가 다녀온 곳들을 시인의 시선과 사진을 통해 다시 떠올려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글도 그렇고 사진도 그러하다. 같은 장소, 사물을 함께 본다 하더라도 각자의 느낌과 기억은 다 다르다. 그런 차이를 통해 내가 미처 살피지 못했던,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좀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훌륭한 인생의 스승은 도처에 숨어 있는 법이다.
여행은 혼자라도 좋고, 단둘이라도 좋고, 여럿이라도 좋다. 혹은 정반대의 이유로 여행 자체가 괴로움으로 남을 수도 있다. 떠나는 여행길이 매번 행복하고 정겹고 따뜻한 기억으로만 남아야 할 필요는 없다. 애써 진지할 필요도, 떠남에 의미를 부여할 것도 아니다. 결국 여행은 반드시 돌아옴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떠났던 이의 현재의 기억에서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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